‘저널링(Journaling)’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 귀소본능과 저널링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려는 본능이 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려는 본능이 있다. 도토리는 떡갈나무가 되려는 본능이 있다. 모든 생명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한 개의 도토리 씨앗 안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결국 떡갈나무가 되게 하는 놀라운 본능이 숨어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에게도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이런 본능(Destiny)이 있다. 이 본능 안에는 ‘내면의 부르심(inner calling)’이 분명 존재한다. 모든 생명이 자기 자신이 되려는 본능이 있듯 이 내면의 부르심은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로 부른다. 연어는 바다로 나가 수년을 살다 때가 되면 내비게이션이나 지도도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정확히 돌아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연어가 자신의 본능(Destiny) 안에 있는 ‘내면의 부름(Calling)’을 듣고 반응했기 때문이다. 내면의 부름에 반응할 때 자기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Destination)에 정확히 도착한다. 그래서 데스터니(Destiny)와 목적지를 의미하는 데스터네이션(Destination)은 어근이 같다. 내면의 부름, 즉 소명(Calling)은 머리와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만큼이나 내재한 천성이다. 만일 이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평생을 자기 안의 ‘떡갈나무’를 잊은 채 ‘도토리’로 살다 끝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전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여긴 것과 같다. 자신 안에 있는 ‘거인’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존고즈홈(JohnGoesHome)은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자기 자신이 되려는 본능을 영적 귀소본능이라 부른다.

영적 귀소본능을 따른 발걸음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요 ‘자기발견’이다. 그렇다면 이 여정에 있어 왜 저널링을 강조할까?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 사람들도 저널링을 작성한다. 크리스천 귀소본능 학교, 존고즈홈이 강조하는 저널링과 일반 저널링은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반 사람들도 ‘내면의 나’에 관심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기록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런 저널링 활동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과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어떤 취향,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앞서 이야기한 본능 안에 있는 ‘내면의 부르심(inner calling)’은 근원이 어디일까? 그것은 ‘영(Spirit)’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일반적인 저널링과 자기를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인간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귀소본능(Destiny)의 근원인 ‘영(Spirit)’으로부터의 소리(inner calling)를 듣지 못하면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정상에서 절망하고 만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난 크리스천에게 있어 자기를 발견하는 것의 주권은 오직 주님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제대로 알 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부르심 위에 온전히 선 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강렬한 임재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Knowing God, not knowing about God)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알 때,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

몇 박 몇 일의 워크숍을 한다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탁월한 도구와 방법론을 사용하고 이미 자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멘토링을 받는다 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이 정하신 저마다의 다른 여정(Journey)을 통해 찾아 온다. 누군가에게 정답이 나에겐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영적인 한 존재가 영적 귀소본능의 소리(inner calling)를 심으신 하나님을 깊이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닫는 그 무엇이다. 단기간에 목표를 정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정(Journey)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정답이 중요한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심어 놓으신 본능(Destiny)안에 본향(Destination)을 향한 갈망이 있다. 이 내면의 소리(calling)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며 깨닫고 느낀 감정들을 기록한 저널링(Journaling)은 본향(Destination)을 향한 여정(Journey)에 있어 매우 중요한 GPS와 나침반 역할을 한다.

저널링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 여정을 뜻하는 ‘Journey’와 저널링의 ‘Journaling’은 ‘날(日, Day), 하루’를 뜻하는 같은 어근(Jour)을 갖고 있다. 여정(Journey)과 저널링(Journaling)은 참 잘 어울리는 단어다. 또한 어근 ‘Jour’는 ‘빛을 비추다(to shine)’란 의미를 내포한다. 저널링을 통해 인생의 여정을 비출 수 있다면 좋겠다.

저널링만 잘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진짜 자기(true-self)’를 발견할 수 있을까? 저널링을 목적이나 도구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널링을 열심히, 아주 잘 하는 것이 자기 발견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그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갈망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는 갈망이 더 크다면 분명 저널링은 도움이 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는 여정 속에 성령님이 주신 감동을 적어놓지 않으면 아무리 뜨거운 감동이었을지라도 쉽게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한 곳에 저널링하며 축적시키고 정기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때 조각 조각 흩어져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단편의 사건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그 안에 놀라운 의미가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성령님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순간이다. 적어놓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 것이다. 보통 이 경험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에 찾아 온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어부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교회가 세워질 반석이라 믿었다. 베드로가 언제 이것을 자각했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계시적으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답했을 때다. 사람들이 믿는 ‘나’가 아닌, 내가 믿는 ‘나’가 아닌 주님이 믿고 계신 ‘나’를 발견하는 것이 이 여정의 본질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홀로됨에서 오는 낯선 외로움과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거룩한 낭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에 비례하여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확률이 올라간다. 부르심은 내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 거하고 거하고 거하고 또 거할 때 어느 순간 알게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은 내 인생 여정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신다. 주님과 함께 하는 여정 속에 쌓인 추억을 저널링으로 남길 때 기록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인생의 점들을 보게 되고 이 점들의 연결을 통해 나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주님의 믿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천의 저널링은 일반인의 저널링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읽을 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기록한다.

I write
because I don’t know
what I think
until I read
what I say

– Flannery O’Conn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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