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8 저녁] 거룩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옵니다

[

HAGAH of the Week

사도행전 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HAGAH of the Day

히브리서 11:24, 27
믿음으로 모세는…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거룩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옵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거룩’을 추구합니다. 원합니다. 노력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킴으로 거룩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천 오백 년을 그렇게 했음에도 실패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지만(칭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살아내기는(성화)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죄,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랐습니다. 회개하고, 결단하지만 어느 순간 제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얻어진 것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거짓 종교는 행위와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이런 노력은 모두 실패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Sin)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들(sins)을 산출하는 근원적인 죄(Sin)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죄로부터 구원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통감한 자가 엎드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는데, 내 노력, 내 공로는 단 한 순간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얻었음에도 우리는 내 노력, 내 공로로 ‘거룩’ 해지려 수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결국 실패한 것을 계속 답습하려 합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해질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람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거룩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노력으로 성인(聖人)이라 칭함을 받을 정도의 자리에 오른다 해도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추구하는 거룩일 뿐 하나님의 거룩은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거룩과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룩은 다릅니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거룩 역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聖靈)님은 ‘Holy Spirit’입니다. ‘거룩한 영’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하여 이 땅 가운데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셨듯, 거룩 역시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의 영, 성령님으로 이뤄야 합니다. ‘거룩하신 영(Holy Spirit)’인 성령님은 그분 안에 있는 거룩을 우리에게 나눠주셔서 실제가 되게 하는 ‘거룩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뤄졌다면, 거룩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란 구절을 만나면 거룩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거룩해지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율법은 구원과 거룩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주장처럼 율법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과 거룩에 이를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란 말씀은 이제 노력이 아닌, 율법을 다 이루시고 내 안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뤄집니다. 나의 노력으로 거룩을 이룬다면 그것은 나의 ‘의’입니다. 이 노력은 사람의 죄성에 기인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이뤄진 것처럼 거룩도 나의 어떠함이 아닌,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그 어떠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뤄지는 겁니다. 구원이 노력이 아니듯, 거룩도 노력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내 전인격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거룩의 과정이 구원의 과정과 같다면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사건을 언급하며 얘기하신 구원의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죄의 근원에는 불순종, 거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불뱀에 물려 다 죽게 됐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실제 뱀에 물린 자 중 놋뱀을 쳐다본 모든 사람은 살았습니다.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4~9)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느냐를 묻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구약의 이 사건을 언급하며 장대에 달린 놋뱀처럼 자신도 매달릴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볼 때 구원을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릴 주님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란 암시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4~16)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 중 착한 사람만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 말씀하신 것을 믿고 쳐다본 사람은 그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모두 살았습니다. 구원은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떠함을 볼 필요도, 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만을 보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나의 어떠함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옷이요, 의요, 구원이요, 거룩이십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삽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 구원을 얻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 임한 주님의 임재를 보면 남은 삶을 헌신합니다. 왜 보는 것이 중요합니까? 보면 믿음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지적으로 노력해도 안믿기는 것은 결국 믿질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들리는 복음이 믿는 우리에게는 믿어집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노력이 아닌 들어온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어오는 겁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NIV)

장대에 달린 놋뱀은 ‘믿음으로’ 봐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믿음으로’ 봐야 합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는 것 같이 봤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봐야 합니다. 이 원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모세에게나, 다윗에게나, 우리에게나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감각으로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보이지 않지만) 진리를 알기에 ‘믿음으로’ 그 실재(實在)를 인정하고 보려 할 때, 그 실재를 보는 것을 통해 하늘의 ‘믿음’이 들어옵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BUT THE RIGHTEOUS man SHALL LIVE BY FAITH.” (NASB)

보는 것과 듣는 것 모두 영적인 감각이 열리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그 영적인 감각이 열릴 때 믿음이 들어 옵니다. 보는 것은 ‘계시(啓示 – 열리다 계, 보이다 시 – 열려서 보이는 것)‘와 깊은 연관이 있고, 이 영적인 감각이 열려 믿음으로 보는 것을 통해 계시가 풀릴 때 하늘의 믿음이 들어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이 믿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에 해당하는 믿음의 역사를 기록한 후 12장에서 ‘믿음으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KJV)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에 충실하게 확대 해석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의 ‘끝’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오직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자)… (히 12:2, 헬라어 번역)

그래서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믿음의 개척자(시작)요 완성자(끝)이신 예수님께 우리 눈을 고정하자… (히 12:2, NIV 번역)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pioneer and perfecter of faith… (NIV)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려 할 때 개척자(시작)이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도와줍니다. 그리고 믿음의 완성자(끝)이신 예수님의 영에 의해 ‘구원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란, ‘거룩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란 믿음이 들어 옵니다. 모든 믿음의 시작과 끝은 오직 예수님이며, 모든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려 할 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새 언약 시대의 성령님은 부활하셔서 우리 안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님과의 교제는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믿음으로 보려 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때 믿음의 개척자이신 예수님이 믿음의 여정을 이끄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보는 것의 임계점을 넘을 때 계시가 풀려 하늘의 믿음이 들어옵니다. 이때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그 단계에 맞는 점진적 구원과 점진적 거룩을 완성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실패했을 때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인생의 경주에서(히 12:1)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 4:15), 앞서가셔서(the Forerunner, KJV – 히 6:20) 경주에 승리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뛰어야 합니다. 상황과 환경과 문제와 나의 어떠함을 바라보면 넘어집니다. 구원과 거룩은 모든 것을 다 감당하시고, 짊어지시고, 승리하시고, 다 이루신 예수님만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마음 모아 함께 기도합시다.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신 주님.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게 하소서. 나의 자격, 나의 실패, 나의 환경, 나의 어려움, 나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짊어지시고 경주에 승리하신 Forerunner이신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구원이 주님을 보는 것으로, 거룩이 주님을 보는 것으로 임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에게 거룩의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온 거룩을 배제한 채 스스로 거룩하려 노력했던 모든 것을 회개합니다. 구원이 선물이듯, 선물과 같은 거룩이 내 안에서부터 생명의 역사로 흘러나와 성령의 열매처럼 맺히길 기도합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는 물 위를 걷습니다.
어떻게요?
그 눈을 예수님께 확고히
고정시켜 바라봄으로써입니다.
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베드로는 가라 앉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동안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려면
두 눈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시야에
항상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고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인내로 달리십시오.

Peter walks on the water.
How?
He keeps his eyes fixed
firmly on Jesus.
As soon as he looked away
he sank.
But as long as Peter fixed
his eyes on Jesus,
he was able to walk on water.
And so we are encouraged,
commanded, implored
to fix our eyes upon Jesus,
lest we grow weary
and lose heart.
Keep him always
in your sight.
Fix your eyes upon Jesus,
and thereby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you.

– 스티픈 텁스트라 (Stephen Terpst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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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church
bhchurch
5 years ago

믿음으로 주님을 더욱 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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