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4 저녁] 지성소의 빛이 여호와삼마로 이끕니다

[

HAGAH of the Week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became a successful man. (NASB)

HAGAH of the Day

시편 105:4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지성소의 빛이 여호와삼마로 이끕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The Lord is there)’란 뜻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된 절망스런 상황.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을 보게 하고 그 성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십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겔 48:35)

여호와삼마는 에스겔서 가장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요한계시록 끝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로 다시 등장합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 21:2~3)

스가랴, 에스겔, 이사야 서를 빼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사도 요한에게 에스겔에게 임했던 뜨거운 감동이 부어집니다. 그 감동으로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을 새롭게 풀어씁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 ‘거기(there)’가 어디입니까?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여호와 삼마, 내가 바로 거기 있다’ 말씀하셨을 때 새 예루살렘이 먼 미래의 추상적 어떤 공간이 아니라 새 영을 받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죽어서 혹은 종말 후 도래할 영광스런 물리적 장소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천국을 직접 경험하고 왔다는 분들의 간증이나 균형 잃은 요한계시록 해석을 들은 경험들이 새 예루살렘은 막연하게 언젠가 가게 될 혹은 경험하게 될 물리적인 장소로 오해하게 합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해석은 본질을 놓치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하늘나라를 의미하기 이전,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 바로 ‘나’를 가리킵니다.

9.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9~10)

교회인 우리를 뜻하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 하고 이어서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즉, 새 예루살렘은 신부인 교회, 다시 말하면 믿는 우리,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님의 영을 모신 ‘나’입니다. 같은 장 2절 말씀을 봐도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신부의 모습을 앞서 보고 계시며,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신부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그런데 옛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지만, 이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2~23)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에 관한 환상을 봤을 때 교회에 관한 계시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를 수신자로 계시록을 썼던 사도 요한은 교회에 관한 선명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새 예루살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하는 교회이며 새 예루살렘의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성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모신 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새 예루살렘인 신부가 성전이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그 신부인 교회도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수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주님의 영과 하나 된 교회인 너희가 바로 성전이다’라고 알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을 향해 ‘여호와삼마’라 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입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 ‘거기’는 바로 내 안에 성전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빛이 있습니다. 해나 달과 같은 자연적인 빛, 전등이나 초와 같은 인공적인 빛 그리고 초자연적인 주님의 빛. 세상 사람은 태양 빛과 인공적인 빛 아래서만 살아갑니다. 크리스천임에도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태양 빛과 인공적인 빛 아래서만 살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전 바깥 뜰은 태양 빛 아래 있습니다. 바깥 뜰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이곳에서 주님과의 일대일 교제는 어렵습니다. 이곳에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깥 뜰은 무리와 함께 신앙 생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넓고 잘 보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영역입니다. 태양 빛 아래서는 모두가 감각을 따라 주님을 만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깥 뜰에 안 계십니다. 바깥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면 태양 빛은 없습니다. 대신 등대의 빛만 있습니다. 등대의 빛은 말씀을 상징하는 진설병의 떡과 맞물린 상징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나온 빛을 경험합니다. 성소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소에서의 신앙생활은 귀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영역이고, 많은 은혜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시 현상을 경험하기 쉬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성소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주님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누리는 은혜일 뿐 주님에게서 온 직접적인 빛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소까지는 감각으로 빛을 인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지성소에는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든 감각이 무용지물인 장소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 언약궤 위 시은좌. 주님이 좌정하신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쉐키나의 영광의 빛. 이 빛은 시신경이 결코 해독할 수 없는 빛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빛입니다. 물리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빛이 아닌 영의 영역에서 온 빛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지성소입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빛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빛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성소의 빛이 새 예루살렘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신부인 교회임을 얘기한 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곧 성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2~23)

오직 주님만이 신부의 영원한 빛이 되는 것. 이것은 요한이 이사야의 예언을 갖고 온 것입니다.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사 60:19~20)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다른 빛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내게 영원한 빛이 되는 것, 그 주님의 빛으로만 살아가는 것을 요한은 ‘단장’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이 빛은 오직 지성소에서만 볼 수 있는 빛입니다.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은 정육면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앞서 보고 계신 ‘신부’의 모습을 함께 보는 중입니다. 요한의 눈에 지금 새 예루살렘은 오직 주님의 빛으로만 단장된 신부와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계 21:16)

새 예루살렘 성을 표현하면서 네모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지성소임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신부는 완전히 단장하여 다른 빛이 아닌 오직 여호와의 빛으로만 살아가는 지성소 자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단장된 신부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여호와삼마’라고 부르라 말씀하셨을 때 요한을 통해 보여줄 신부로서의 새 예루살렘, 영광스런 교회를 앞서 보고 계셨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거기 있다. 내가 바로 영으로 너와 함께 있다. 나의 영과 하나가 된 바로 네가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아. 네가 바로 지성소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듯한 절망스런 상황에서 과연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삼마로 나타난 내가 바로 새 예루살렘인 네 안에 있다. 내가 바로 너의 그곳, 거기에 있다. 나의 이름은 여호와삼마다. 거기 있는 나를 만나는 순간 다른 빛은 사라지고 오직 나의 빛이 너를 비출 것이다. 너는 나의 새 예루살렘, 나의 신부, 나의 처소다.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는 순간 영생은 시작입니다. 영생은 지금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신 주님이 영으로 내 안에 오신 순간 새 예루살렘은 시작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지금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며,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하나님(I AM)입니다.

사복음서에 예수님을 따르던 허다한 무리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들 모두가 지성소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성소는 무리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성소는 오직 연인 한 사람만 들어갑니다. 무리가 연인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지만 다른 빛으로 살아간다면 아직 연인이 아니라 무리에 속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연인만이 지성소에 있는 주님의 빛으로만 살아갑니다. 허다한 무리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주님을 멈춰 세웠습니다. 바디매오였습니다. 주님 앞에 서서 주님과 일대일로 마주한 자는 무리가 아닌 오직 한 사람입니다. 주님과 얼굴을 마주한 그 자리가 주님이 계신 지성소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살아난 시신경을 통해 바디매오 눈에 주님의 상(象)이 맺힙니다. 주님의 눈과 눈을 마주 본 그 자리. 주님이 내게 실제가 된 그 자리. 주님이 과연 여기 계시는구나 깨닫는 그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여호와삼마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2)

믿음이 지성소에 들어가게 합니다. 믿음이 지성소의 빛을 보게 합니다. 지성소의 빛을 보게 한 그 믿음이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 믿음이 지금 영생을 누리고, 지금 새 예루살렘을 경험하게 합니다. 과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현실과 감각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주님이 아니고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믿음이 지성소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 믿음이 지성소의 빛을 보게 합니다. 그 빛을 보는 한순간 주님의 눈이 나와 마주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호와삼마.

마음 모아 함께 기도합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인 빛을 보지 못하는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의 연인이 아닌 무리 중 한 사람으로 서 있던 저는 종교인처럼 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 당신의 그 결을 헤아리지도 않는 가운데 눈과 귀를 닫고 주님을 추구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바로 거기에 계시는데, 영적인 빛을 보지 못해 주님을 인식 못 하는 저를 도와주소서. 새 예루살렘 전체를 지성소로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요한에게 임했던 것처럼, 주님이 보고 계신 그 영광스런 모습이 내게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신 신부의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나의 영원한 빛으로 살아가는 주의 거룩한 신부로 단장되기를 갈망합니다. 바깥 뜰과 성소에 머무는 자로 살지 않게 하시고 오직 믿음으로만 경험하는 지성소의 빛 가운데 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삼마.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내일 가운데
이미 계십니다.
그는 이미 당신의 미래가
어떠할지 아시며
그것을 완벽히 통제하십니다.
여호와삼마이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갖고 있는
계획을 안다(렘 29:11).”
주님이 바로 거기,
그 계획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내일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Jehovah-shammah.
THE LORD IS THERE!!
Our God is already
in your tomorrow.
He already knows
what your future looks like
and He has complete control
over it.
We are told in Jeremiah 29:11 (NLT)
that Jehovah-shammah says,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 LORD IS THERE!!
God is THERE in your tomorrow.

– 레아 아담스 (Leah Adams) –

배경음악 작곡/연주 : 곽은기 / 제목 : 일상 / Release : 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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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years ago

고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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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years ago

God is there, in your tomorrow.
대표님
여호와께서
주께서
거기 계십니다

대표님의 내일에 계십니다

대표님의 오늘에 계십니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것임이라

대표님
여호와 삼마로 함께 계십니다

힘내세요

믿는 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는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새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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