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DAY 6 – 생수와 열매

HAGAH OF THE LESSON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NIV)

KEY QUESTION

  • 내게 벌어진 사건과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생장점은 어디입니까?
  • 솔로몬의 성전은 어디에 세워집니까? 왜 그럴까요?
  •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수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열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절로 한 주 '하가'하는 이유 펼쳐보기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거죠. 상황이, 환경이, 감정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이 돼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려면 한 절의 말씀이라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인상 깊은 구절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생각날 때마다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때 그 말씀을 접하며 받았던 감동과 인상을 암송할 구절 한 절에 압축하여 함께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즉, 암송은 한 절을 하지만 그 절을 품고 있는 전체 컨텍스트 혹은 감동을 그 한 절에 압축하여 기억하는 거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전체 컨텍스트를 한 절(節)로, 한 절을 다시 한 구(句)로, 한 구를 다시 한 단어(單語)로 압축하여 기억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이런 훈련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서 한 단어만 떠올려도 그 단어를 품고 있는 구와 절과 전체 컨텍스트가 함께 살아나거든요. 주님이 말씀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칠 재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씀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그 절(또는 구나 단어)을 수시로 떠올립니다. 밥을 먹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자꾸 말씀을 입술에 끄집어 올립니다. 이때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다란 느낌을 갖고 중얼거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면 내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읽는 주체가 되면, 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말씀조차 믿음으로 중얼거리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삶의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가 바로 이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의 지혜요, 하가의 유익입니다.

‘한 절로 한 주 하가하기 (A VERSE A WEEK, AVAW)’는 이런 배경 아래 시작됐습니다.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주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의 재료를 공급해 드립니다.

DAY 6

[AVAW-치유와 회복]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 생수와 열매 –

읽고 있는 글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생명과 영입니다.
지금 이 시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샘물을 어떻게 마실 수 있을까요?

– 데일리하가 –

수많은 사람이 부부 관계, 자녀 문제, 재정 문제, 진로 문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질병 등 이외 여러 이유로 갈등을 겪고 아파하며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가 생기기도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겪은 충격적인 상처는 그 인생 전체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릇된 가치관, 수치심, 낮은 자존감, 증오심의 기저엔 깊은 쓴 뿌리와 상처가 내재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남성에 관한 아주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겠죠. 상처는 본질을 왜곡시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가장 먼저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정죄감이 들어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합니다. 하나님이 더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고 벌주실 것이란 생각 때문이죠. 상처가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킨 겁니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게 일어난 사건이나 현재 상황이 아닙니다. 그 사건과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은 내 통제 밖에서 벌어집니다. 내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내게 벌어지는 수많은 일은 내 최상의 노력이나 선택과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어느 한순간 형들의 배신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땅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을 바로 앞에 두고 살인을 모의하는 형들의 얘기가 요셉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을까요? 결국, 노예로 팔려 가면서 형들에게서 차츰 멀어질 때 가족에게 버림받는 그 아픔이란 요셉에게 얼마나 컸을까요? 틀림없이 애굽에서 하루하루 죽음의 위기 속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삶을 사는 동안 문득문득 가슴 한 켠 시린 감정이 요셉을 힘들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사건을 일으킨 문제가 자신의 남은 삶을 망가뜨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상처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게 일어난 사건이나 현재 상황이 아닙니다. 그 사건과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이 해석은 관점에 의해 좌우되고 이 관점은 영적인 고도(高度)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건을 일으킨 문제가 커 보이는 이유는 그 문제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눈높이가 같으면 그 문제의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고도를 높여 문제가 아닌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문제에 대한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되고, 그 관점을 통해 내게 벌어진 문제와 현재 상황을 바르게 해석할 힘이 생깁니다. 요셉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항상 의지했고, 날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려 했습니다(창 39:2~3, 21, 23). 여러 시련을 겪는 동안 요셉은 날마다 자신의 고도를 높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고 자신을 배반했던 형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요셉 앞에 섰습니다. 만일 요셉이 벌어진 사건과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눈앞에 있던 형들을 원망하며 앙갚음을 하려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요셉은 문제와 함께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해석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형들이 자신을 판 게 아니라 하나님이 형들 앞서 먼저 보내신 것이라고.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4~5, 7~8)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벌어진 사건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한 해석은 관점에 달려 있고, 이 관점은 자신이 밟고 있는 영적 고도에 달렸습니다. 요셉은 상처가 더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까지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적 고도가 높이 올라가 하늘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순간 자신의 상처 위에 애굽의 총리가 세워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형들의 배신이 없었다면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았다면 보디발의 집에 없었을 것이고요. 보디발의 집에 없었다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지 못했겠죠. 그런 특별한 죄수가 되지 않았다면 바로의 신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면 2년이 지나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소환되지 않았을 거고요.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면 바로는 결코 요셉을 애굽 전체 총리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형들의 배신은 너무나 큰 상처였지만 그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영적 고도를 높여 하늘의 관점을 회복했을 때 그 상처 위에 총리가 세워진 것을 깨닫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정치적 왕으로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했을 때 이들은 예수님께 그런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조롱 속에 허무하게 죽으십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땅에서 그 상처와 같은 높이로 본 자들은 모두 좌절했습니다. 그 상처는 수치와 어리석음의 상징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고도가 높아진 순간 그 상처로부터 영생으로 이끄는 샘물이 솟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까지 고도를 높인 자는 그 상처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주님의 영광과 지혜와 위대함을 봅니다. 바로 그 상처 위에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의 영생이 세워진 것을 깨닫습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자에게 상처는 시린 아픔이지만, 발을 하늘에 디디는 자에게 상처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세우시는 생장점(growing point, 生長點) 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빈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흑인 사생아였습니다. 9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14살에 미혼모가 된 후 2주 만에 아이의 죽음을 지켜봤습니다. 마약 복용으로 수감경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누구보다 상처가 무엇인지 잘 아는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책 <이것이 사명이다 (This is Mission)>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보다 큰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이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프리는 극복된 상처 위에 사명이 세워지는 것을 깨달은 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려서 아버지가 살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합니다. 큰 상처 속에 고아로 성장합니다. 청년 때 혁명당에 가담했다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죽기 직전 황제의 특사로 간신히 풀려났지만 4년 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결혼했지만, 아내는 옛 연인을 계속 만나다 병들어 죽습니다. 재혼해 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들도 병으로 죽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큰 상처는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송두리째 앗아간 간질병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삶을 깊이,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말년에 자신의 간질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고도에 선 것입니다. 바로 그 상처 위에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 <백야>와 같은 대작이 세워졌습니다.

극복된 상처는 새로운 축복의 문입니다. ‘하나님은 부서진 것을 사용하신다‘는 유대인 속담이 있습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됩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어디에 세워집니까? 타작마당입니다. 단단한 알곡을 타작해서 가루가 되면 기름을 부어 빵을 만듭니다. 고운 가루 위에 기름을 붓지 알곡에 기름을 부을 수 없습니다. 내 자아의 단단한 모든 것이 완전히 타작되어 고운 가루가 된 그 자리에 주님이 기름을 붓고 주님의 몸을 세우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안에 내재한 상처는 사람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증오, 원망, 절망, 경멸, 수치 등의 단어가 이 여인을 붙들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와 같은 눈높이에 있는 사람은 그 문제에 영향을 받습니다. 특별히 그 문제가 심각한 상처일 때는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여인의 삶이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치료자 예수님이 생수를 선물로 들고 찾아오십니다. 이 여인의 상처가 남편이었기에 완전한 치료자 남편으로 찾아오십니다. 이 얼마나 멋진 주님이십니까? 여인과의 대화 끝에 주님은 여인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음에 틀림없습니다(요 4:26, 29). 생수를 선물로 받은 겁니다. 주님이 그 여인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세상의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방편의 상징인 물동이를 버려둡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로 피하기만 했던 동네 사람에게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8)

어쩌면 이 여인은 어린 시절 꽤 매력적이고, 사교적이고, 말도 잘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한 남자와 헤어져도 또 다른 남자가 여전히 이 여인을 필요로 한 걸 보면 끌리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주셨던 선물이요 강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했고 남용한 결과는 자신의 상처가 됐습니다. 상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본질을 왜곡시킵니다. 이 강점은 틀림없이 이 여인의 사명과 관계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상처 속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완전히 망각한 채 절망하며 원망하며 증오하며 인생을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 속에 주님의 생수가 흐르자 원래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던 사람을 끄는 그 어떤 힘이 극복된 상처 위에 생수와 함께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사욕을 위해 사용되었던 그 어떤 힘이 상처가 극복되자 이제는 사명과 맞물려 사용되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 겁니다. 마치 오프라 윈프리가 “남보다 큰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이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여인의 큰 아픔의 자리는 수치 속에 숨어 지내던 그녀를 가장 유능한 복음 전도자로 일깨운 사명의 자리가 됩니다.

상처의 회복을 기점으로 사명의 회복이 이뤄지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말씀을 예수님이 직접 하십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요 4:36)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에서 “영생에 이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인데, 이 구절은 이미 예수님이 여인에게 똑같이 사용하셨던 구절이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영생하도록” 부분이 원어로는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입니다. 이 구절의 원어적 의미는 “영생을 향하게 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솟아나는 샘물“을 먼저 말씀하셨었고(요 4:14), 그다음 여인이 회복된 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열매“를 말씀하신 겁니다(요 4:36). 생수의 첫 번째 결과안에서부터 역사하여 내면의 치유와 회복을 가져오고, 생수의 두 번째 결과밖으로 역사하여 사명의 열매를 가져오는 겁니다. 이 모두 생명의 역사인데 주님의 생명이 일으키는 내면의 역사생수(영생에 이르게 하는 솟아나는 샘물)로, 주님의 생명이 일으키는 외면의 역사열매(영생에 이르게 하는 열매)로 표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도 보여주고 싶으신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큰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솟아나는 샘물은 모든 쓴 뿌리와 상처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회복이 있는 그 자리에 생명이 자랄 것이고 우리가 그 생명에 붙어있는 한 주님은 우리를 통해 그 생명이 만들어내는 사명의 열매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사랑의 주님. 내 안에 뿌리 깊이 자리한 상처가 얼마나 많이 본질을 왜곡시키는지요.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해석으로 내 인생을 얼마나 궁지로 몰아넣었고 삶을 피폐하게 했었는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잘못된 해석을 하며 살아가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던 주님. 요셉의 눈을 열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상처 위에 총리가 세워졌음을 보게 하신 주님. 우리로 주님의 상처 위에 영원한 생명이 세워진 것을 보게 하소서. 극복된 상처 위에 사명이 세워지는 것을 알게 하소서. 벌어진 사건과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자로 살지 않게 하시고, 나의 고도를 높이사 문제가 아닌 문제 위에 계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바다의 성난 파도를 보는 자가 아니라 그 물 위를 걷고 계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 알곡에 기름을 붓지 않고 고운 가루 위에 기름을 부으시는 주님. 타작마당 위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완전히 타작되어 고운 가루가 된 그 자리에 주의 기름을 붓고 주님의 몸을 세우소서. 그 어떤 소망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된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를 받아들인 순간 새로운 사명자로 거듭나는 것을 봅니다. 주님. 나의 극복된 상처가 주의 지혜와 권능과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 생수로 인해 내면의 치유와 회복이 있게 하시고, 그 넘치는 생명으로 인해 외면의 열매가 풍성하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주님이 이 땅에 나를 보내신 명확한 이유가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내게 두신 나만의 맛이 있음을 믿습니다. 쓴 뿌리로 인해 가려졌던 나만의 맛을 회복하기 소원합니다. 주의 생수로 내 모든 쓴 뿌리를 씻으사 잊고 있었던 나만의 매력을 되찾게 하소서. 나만의 강점을 보게 하소서. 나만의 달란트를 보게 하소서. 주님이 두신 나다움을 발견하게 하소서.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을 길어 당신의 생명으로 가득한 열매 맺는 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고난은
건강할 땐 볼 수 없는
은혜를 가져옵니다.
포도의 달콤한 즙은
포도의 으깨짐을 통해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쉼 역시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고난이 있는 한
그것을 잘 이용하십시오.

Affliction brings out graces
that cannot be seen
in a time of health.
It is the treading of the grapes
that brings out
the sweet juices of the vine;
so it is affliction
that draws forth submission,
weans us from the world,
and complete rest in God.
Use afflictions
while you have them.

– 로버트 머래이 맥체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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