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DAY 3 – 네 남편을 불러 오라

HAGAH OF THE LESSON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NIV)

KEY QUESTION

  • 주님은 왜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나요?
  • 주님은 생수를 달라는 여인의 요청에 왜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을까요?
  • 주님은 만남의 장소로 왜 우물을 선택하셨습니까?
  • 주님보다 더 의지하는 나의 남편은 무엇입니까?
  • 왜 주님이 나의 완전한 남편일까요?
한 절로 한 주 '하가'하는 이유 펼쳐보기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거죠. 상황이, 환경이, 감정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이 돼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려면 한 절의 말씀이라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인상 깊은 구절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생각날 때마다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때 그 말씀을 접하며 받았던 감동과 인상을 암송할 구절 한 절에 압축하여 함께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즉, 암송은 한 절을 하지만 그 절을 품고 있는 전체 컨텍스트 혹은 감동을 그 한 절에 압축하여 기억하는 거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전체 컨텍스트를 한 절(節)로, 한 절을 다시 한 구(句)로, 한 구를 다시 한 단어(單語)로 압축하여 기억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이런 훈련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서 한 단어만 떠올려도 그 단어를 품고 있는 구와 절과 전체 컨텍스트가 함께 살아나거든요. 주님이 말씀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칠 재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씀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그 절(또는 구나 단어)을 수시로 떠올립니다. 밥을 먹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자꾸 말씀을 입술에 끄집어 올립니다. 이때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다란 느낌을 갖고 중얼거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면 내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읽는 주체가 되면, 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말씀조차 믿음으로 중얼거리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삶의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가 바로 이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의 지혜요, 하가의 유익입니다.

‘한 절로 한 주 하가하기 (A VERSE A WEEK, AVAW)’는 이런 배경 아래 시작됐습니다.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주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의 재료를 공급해 드립니다.

DAY 3

[AVAW-치유와 회복]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제야 주님은
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데일리하가 –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가야만 (had to go) 했던 이유는 여인의 잘못을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기 위해서였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도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리며 움직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최상의 때를 기다리셨고 마침내 그 때가 찼을 때 주님은 움직이셨습니다. 이 때가 차기까지 우리의 목마름보다 주님의 목마름이 더 크다는 사실에 눈이 떠지길 소망합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을 위해 주님은 유대인이 모두 꺼리는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우물가에 나올 정오(유대 시간으로 여섯 시)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땀을 흘리며 한걸음에 먼 길을 고단하게 달리셨던 것 같습니다. 도착할 즈음 주님은 지치셨고 우뭍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요 4:6)

주님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의 피곤을 몸소 느끼시는 가운데 ‘그대로’ 앉으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달려오신 겁니다. 이것이 이 여인과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이 확신하고 계신 우리 모두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그 당시 유대 랍비는 대낮에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그것도 사마리아인이었던 한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7)

주님은 사랑하는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생수를 주기 위해 먼저 필요했던 것은 이 여인이 마음의 문을 열고 자원하여 그것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원하여 생수를 요청한다 해도 그 마음속에 쓴뿌리가 있다면 생수를 줘도 그 쓴뿌리로 인해 생수가 오염되리라는 것 역시 주님은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가장 먼저 이 여인의 가장 아픈 부분을 만져주기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상처가 생수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런 몇 수를 미리 생각하시고 ‘물을 좀 달라’는 포석을 두신 겁니다.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 유대인. 그것도 대낮에 여인에게 말을 걸 것 같지 않은 유대인 남성이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요 4:9)

오랜 세월 수많은 남성에게 버림을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를 이 여인 깊숙한 곳에 영원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주님은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상처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지 않은 이 여인 안에 내재한 목마름을 터치하셨습니다. 망가진 인생 될 대로 되라는 심정 저 깊숙한 곳에 내재한 하나님의 선물을 향한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듣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란 단어가 0.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이 여인의 마음에 부딪혔을 겁니다. 주님은 PPL처럼 이 여인의 뇌리 안에 ‘하나님의 선물’이란 복선을 까셨습니다. 매우 낯선 상황. 수많은 상처와 어려움 가운데 계발됐을 이 여인의 뛰어난 직관은 그 순간 ‘뭔가 있다’란 느낌과 함께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절대로 말 걸지 않을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을 언급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오히려 내가 그에게 샘솟는 물을 요청할 거라고 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이 얘기하는 샘솟는 물이란 뭘까? 뭔가 있는 사람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추앙하는 야곱보다 더 큰 사람이려고?’

그 당시 야곱의 우물 깊이는 30미터 정도 됐습니다. 보통 우물 옆에 물길을 줄 달린 그릇이 놓여 있지만, 이 마을 우물에는 각자가 줄 달린 물길을 그릇을 가지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샘솟는 물을 주겠다고 하는 이 남자에게 줄 달린 물길을 그릇이 없다는 것과 사마리아 사람이 쓰던 물길을 그릇을 유대인은 절대 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샘솟는 물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육신의 목마름을 해갈해줄 물을 이 남자가 어떻게 주겠다는건지 궁금했을 겁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1~12)

이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물은 다시 목마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차가 없던 사람이 소형차를 갖게 되면 너무 기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좋은 차에 대한 목마름이 생깁니다. 집이 없던 사람이 자기 집을 갖게 되면 너무 기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큰 집에 대한 목마름이 생깁니다. 신발이 열 켤레 있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수천억 재산이 있는 사람도 여전히 돈에 대한 목마름이 해갈되지 않습니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목마름도 끝이 없습니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목마름도 끝이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기대도 끝이 없습니다. 이것만 채워지면 모든 걸 만족할 것 같지만, 막상 그게 채워지면 또 다른 목마름이 다가옵니다. 이 땅의 물은 마실수록 더 목마릅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어색한 대화 전개입니다. 주님은 왜 대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갑자기 ‘남편’ 얘기를 꺼내셨을까요? 주님은 생수를 주기 원하셨습니다. 너무나도. 하지만 이 여인 안에 내재한 상처쓴뿌리가 영원을 향한 목마름을 막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생수를 주기 원하시는 주님은 이 여인의 가장 은밀하고 깊은 상처를 먼저 만지셔야 했습니다. 쓴뿌리가 있는 곳에 생수가 임하면 그 물은 오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여인 안에 내재한 상처와 욕망은 모든 것을 삼키고 소진시켰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늘 목말랐습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 여인이 남편 없이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이란,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그 무엇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목마를 것 같아 끊임없이 의존하려는 그 무엇. 자기를 만족하게 할 것 같아 열심히 추구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그런 남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삼킬 정도의 욕망과 그 필요를 먹이는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상처.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가장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그런 지점. 그 아픔 중에도 여전히 이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자신의 힘으로 붙들고 의존하려는 그 무엇. 오늘 이런 은밀하고 가장 숨기고 싶은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이 오셔서 가장 먼저 내게 하실 말씀은 “네 남편을 불러 오라.”가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주기 이전에 나의 가장 절망스런 쓴뿌리를 먼저 만지고 싶어 하시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남편으로 해결하려 했던 사마리아 여인 앞에 주님이 섰습니다. 그리고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이 여인의 진짜 남편이라는 것을요. 숫자 7은 완전수이자 참 안식을 상징합니다. 여섯 번 남편으로 상징되는 세상이 주는 물을 마시려던 한 여인 앞에 영원한 샘솟는 물을 주기 위해 일곱 번째 남자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완전한 남편이요, 우리의 참 안식입니다.

성경에서 우물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를 얻게 된 곳도,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을 만난 곳도, 모세가 자기 아내 십보라를 만난 곳도 모두 우물이었습니다.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창 24:13~15)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창 29:11)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출 2:15~17, 21)

또한 성경은 주님이 우리의 참 신랑이심을 나타내며(고후 11:2, 계 19:7~9) 구약에서도 주님이 우리의 남편임을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렘 3:14)

육신은 물이 필요합니다. 우물은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근원(根源, source)을 상징합니다. 죄는 영원의 근원을 버리고 인간 스스로 근원을 파게 했습니다. 이 안타까움을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하지만 사람이 판 우물은 터진 웅덩이여서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로 그 가치를 입증할 자신의 신부를 이 우물에서 만나기로 하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샘물의 ‘샘’에 사용된 헬라어 ‘페게‘는 ‘우물’, ‘근원(根源, source)‘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물’에 사용된 헬라어 ‘휘도르’는 물 중에서도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을 뜻합니다. 자기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세상의 우물을 근원(根源, source)으로 삼던 신부를 향해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이 참 우물이요 참 남편이신 것을 보여주시고자 만남의 장소로 우물을 선택하신 겁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수치와 부끄러움과 치욕 가운데 있던 자기 백성을 향해 자신이 ‘남편’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시는 그런 수치와 부끄러움과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을 나타내십니다.

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사 54:4~5)

이사야 말씀을 잘 알고 계시던 주님은 이 구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 앞에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참 남편으로 서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여인의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목마름을 친히 십자가로 가져와 그 여인을 대신하여 “내가 목마르다” 외치시며 옆구리 온 인류를 위한 생명의 물을 쏟으시고 죽음으로 그녀의 영원한 생수가 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버림받고, 저 사람에게 버림받고, 동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던 이 여인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치욕을 친히 십자가로 모두 가져와 그 여인을 대신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시며 죽음으로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할 완전한 남편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교회의 머리이시자 우리 모두의 영원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때가 차기까지,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시고 아가서 술람미 여인을 기다리셨던 주님. 동네 어귀에서 까치발을 한 채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바라보며 기다리시던 내 아버지. 양 아흔 아홉 마리가 남았다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모든 희생을 감내하시는 주님. 목마르고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를 찾아 한걸음에 와야만 했던 그 사랑에 내 빗장이 풀리길 소원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깊은 눈으로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시고 이름을 부르시며 생수를 주시려는 당신의 초대에 내가 응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확신 위에 나를 세웁니다. 주의 거룩한 신부가 되게 하소서.
  • 마셔도 다시 목마른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우물을 길으며 살았던 내 삶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내 눈이 가리어져 하늘의 우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어 나의 노력 없이 샘물이 솟으리라 생각 못 하고 물 길을 그릇만 꼭 붙들며 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우물에서 물을 얻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했던 어리석음을 긍휼히 여기소서. 내 눈을 여사 하늘의 우물을 보게 하시고 믿는 자 가운데 두신 생수의 근원을 갈망하게 하시며 이 근원을 가로막고 있던 나의 쓴 뿌리를 치유하소서.
  • 나의 목마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외치신 주님. 내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과 상실을 모두 십자가로 가져와 나를 대신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시며 완전히 버림받으신 주님. 주님만이 나의 완전한 남편이요, 참 안식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아닌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이전의 모든 남편에서 제가 참 남편이신 주님께로 돌아서길 원합니다. 저를 이끄소서. 내 안의 남편을 드러내소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던 그 울림이 나를 흔드소서. 그 음성을 내가 외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던 인생이었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생명의 근원을 가로막고 있던 문제들이 주님 앞에 드러나고 처리되길 소원합니다. 주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제게도 주소서.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와서 보십시오,
십자가의 승리를.
그리스도의 상처가
당신의 치유이고,
그의 고통이 당신의 휴식이고,
그의 갈등이 당신의 승리이고,
그의 신음이 당신의 노래이고,
그의 아픔이 당신의 편안함이고,
그의 부끄러움이 당신의 영광이고,
그의 죽음이 당신의 생명이며,
그의 고초가 당신의 구원입니다.

Come, and see
the victories of the cross.
Christ’s wounds are
thy healings,
His agonies thy repose,
His conflicts thy conquests,
His groans thy songs,
His pains thine ease,
His shame thy glory,
His death thy life,
His sufferings thy salvation.

– 매튜 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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