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DAY 2 – 가야만(had to go) 했습니다

HAGAH OF THE LESSON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NIV)

KEY QUESTION

  • 왜 주님은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을까요?
  •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가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넬 때 주님의 목소리, 눈빛은 과연 어땠을까요?
한 절로 한 주 '하가'하는 이유 펼쳐보기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거죠. 상황이, 환경이, 감정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이 돼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려면 한 절의 말씀이라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인상 깊은 구절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생각날 때마다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때 그 말씀을 접하며 받았던 감동과 인상을 암송할 구절 한 절에 압축하여 함께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즉, 암송은 한 절을 하지만 그 절을 품고 있는 전체 컨텍스트 혹은 감동을 그 한 절에 압축하여 기억하는 거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전체 컨텍스트를 한 절(節)로, 한 절을 다시 한 구(句)로, 한 구를 다시 한 단어(單語)로 압축하여 기억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이런 훈련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서 한 단어만 떠올려도 그 단어를 품고 있는 구와 절과 전체 컨텍스트가 함께 살아나거든요. 주님이 말씀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칠 재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씀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그 절(또는 구나 단어)을 수시로 떠올립니다. 밥을 먹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자꾸 말씀을 입술에 끄집어 올립니다. 이때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다란 느낌을 갖고 중얼거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면 내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읽는 주체가 되면, 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말씀조차 믿음으로 중얼거리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삶의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가 바로 이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의 지혜요, 하가의 유익입니다.

‘한 절로 한 주 하가하기 (A VERSE A WEEK, AVAW)’는 이런 배경 아래 시작됐습니다.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주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의 재료를 공급해 드립니다.

DAY 2

[AVAW-치유와 회복]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 가야만(had to go) 했습니다 –

이 글을
눈으로 읽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 중심이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 데일리하가 –

어린 딸 아이가 아파서 울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부모는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를 ‘가야만’ 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3~4)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NIV)

모든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예수님이 ‘가야만(had to)’ 했다고 번역합니다. 어쩌다 기분 따라 사마리아로 가신 게 아닙니다. 유대인이 그토록 상종하고 싶지 않던 사마리아로 ‘가야만’하는 명확한 이유가 예수님께 있었던 겁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자기에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할 때 나와 내 가족이 뭔가 잘못한 게 있어 하나님이 벌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믿음을 낳습니다. 그 잘못된 믿음은 내 감정, 태도, 행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실수할 때마다, 실패할 때마다, 심각한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이런 내 모습에 실망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죄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노력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려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정도가 될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듯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자면,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 앞에 얼굴도 들지 못했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을 피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는 느낌. 너무나도 끔찍한 감정입니다. 이 여인은 어쩌면 자신의 과거에 화가 난 하나님이 벌을 주신 결과로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피하는데 하나님은 오죽하겠느냐는 그런 생각.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직 상처 입은 한 여인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사마리아에 ‘가야만 (had to go)’ 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만나야 할 ‘때’를 항상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상상입니다만, 어쩌면 첫 번째 남편과 헤어졌을 때 다른 형태로 방문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이야기해도 이 여인은 듣지 않았을지 모르죠. 우리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요. 주님은 이 여인의 인생 주변에 늘 서성이며 기다리셨습니다. 마치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이 자원하여 기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까지 가장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기다리셨던 것처럼요.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오직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요. 어쩌면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약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 사람이 다 외면할지라도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이 여인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죄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러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대신하여 곧 자신이 십자가 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가치를 알고 계셨기에 십자가상에서 그 값을 지불하심으로 그 가치를 최종 확증하셨습니다. 세상이 이 여인을 어떻게 평가하든, 여인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여인의 가치를 증명하십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야만 (had to go)’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가야만’ 하셨다면, 그 주님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도 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상황에 있든, 세상과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주님께 충분히 그런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주님은 일부러 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아 그 뜨거운 중동의 정오에 물 길으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처 많은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요. 주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거나, 당황케 하거나, 판단하거나, 가르쳐주기 위해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주님은 벌주고, 정죄하고, 꾸짖기 위해 죄 많고 상처 입은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것을 감안해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얼마나 조심스럽게, 얼마나 친절히 말씀하셨을지 상상해 볼까요?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7~18)
“I have no husband,” she replied. Jesus said to her, “You are right when you say you have no husband.
The fact is,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man you now have is not your husband. What you have just said is quite true.” (NIV)

주님은 동네 사람마저도 피하고 싶은 이 여인의 심리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겁니다. 사마리아인을 혐오하는 유대인 그중에서도 낯선 남자가 말을 걸 때 이 여인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요. 생수를 주고 싶으신 주님은 이 여인의 마음을 무시한 채 다가서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섬세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답하는 이 여인을 향해 “지금 네가 거짓말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며 조롱하는 투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대화의 NIV 번역을 잘 보시면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You are right when you say you have no husband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 (중간 내용) … What you have just said is quite true.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고, 지금 있는 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내용 앞과 뒤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여인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강한 긍정의 말(‘참으로 옳습니다.’, ‘참으로 진실입니다.’)을 하십니다. 상담 기법 중 피상담자의 말에 적극 귀 기울이며 동의한 후 필요한 말을 하라는 것의 원조는 주님이십니다. “You are right!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할 때 ‘옳다’의 헬라어 ‘칼로스’아주 탁월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여인이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나는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싶고, 당신을 지지하고 싶습니다.’란 신호를 보내는 가운데 “당신이 참으로 옳습니다!”라고 얘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두고 머뭇거린 후 조심스럽게 얘기의 본론인 “당신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상태니 남편이 아닌 건 분명하네요.”라고 얘기를 하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렇게만 얘기하고 나면 혹시나 정죄하는 말처럼 비칠까 봐 대화의 끝을 다시 한번 “당신이 좀전에 한 말은 정말 진실하군요.”라고 샌드위치처럼 마무리하신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또한, 주님은 이 여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 드러날 때 당황할 수도 있는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자들 없이 오직 혼자 만나시는 상황을 연출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이 양식을 사러 동네 들어가도록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를 주님이 알고 계셨고, 그것을 가장 은밀히 다루기 원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 정도로 조심스럽고 배려하시는 분입니다.

이와 똑같이 주님은 나의 죄를 알고 계십니다. 나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도요. 주님은 내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목마름도 압니다. 내가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우물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주님은 이 우물가에서 나를 만날 가장 최상의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나저제나. 그리고 마침내 가슴 벅찬 열망을 안고 나를 찾아오실 때 내 죄를 질책하고, 조롱하고, 부끄럽게 하고, 당황하게 할 그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헤아리시며,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공감하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나의 가치를 가장 정확히 아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바꾼 가치입니다. 질책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달을 때,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끔찍한 일이 내 삶을 휘감고 있다 할지라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 마음을 주님께 열어 드린다면 그 사랑이 나를 만지고 치유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의 낯을 피해 정오에 물 길으러 나왔던 여인마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이전 내 삶의 궤적이 어떠했든 주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 것 같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애타게 우리를 먼저 찾으셨고,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때가 되었을 때 한걸음에 달려오셨으며,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언제나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닫기 전에 우리는 나의 목마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요한은 기록합니다. 상처 입은 죄 많은 한 여인을 기다리며 주님이 목이 말랐다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듯, 우리가 목마르기 전에 주님이 먼저 목마르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목마름은 주님이 목마르시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목마르십니다. “주님 한 분 외에는 나를 만족하게 할 분이 없습니다!”란 아름다운 고백 훨씬 이전에 “너 외에는 나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게 이 세상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외치셨던 주님의 마음에 눈을 떠야겠습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먹이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허락하고, 받아들이기를 갈망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랑으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을 ‘목양’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사랑을 허락하고, 받아들이고, 먹고, 흡수하여 기쁨을 얻었을 때 주님은 가장 큰 기쁨과 새로운 힘과 양식을 얻으셨습니다. 내가 나의 상태와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능히 압도하는 주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또한 죄가 더한 곳에 주의 은혜가 차고 흘러넘치는 것을 믿음으로 취하여 기뻐하며 복음이 복음 되게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양식이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랑을 먹이실 때 가장 행복하십니다.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아 있던 주님께 새로운 힘을 공급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께는 참 양식입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1~34)

“너 외에는 나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게 이 세상 아무것도 없구나!”란 목마름을 가지신 주님이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듯, 그 주님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나기를 갈망하십니다. 주님의 이 목마름의 크기가 나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한 최상의 때를 항상 살피셨던 주님. 마침내 그때가 되었을 때 모든 유불리를 떠나 오직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야만 하셨던 주님. 바로 그 주님이 내 인생을 주목하고 계시고, 마침내 그때가 되었을 때 모든 천사에게 “내가 가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실 주님임을 믿습니다. 오셔서 주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던 나의 참된 가치에 눈을 뜨게 하소서.
  • 사랑의 주님. 구약의 프레임에 묶여 아버지의 사랑을 왜곡시키고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오해로부터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나의 모든 변명에 질책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래, 네가 옳구나. 그래, 네가 참 잘 말하였구나.”라고 토닥이며 섬세하고 은밀하게 생수의 흐름을 가로막는 나의 상처를 다루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그 큰 사랑에 눈뜨게 하소서.
  • “나에게 주님 한 분 외에는 만족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내가 주님을 사랑한 줄 알았고, 내가 목마른 줄 알았습니다. 주님. 그런데 주님이 먼저 목마르셨고,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거였군요. 이 모든 것이 “너 외에는 내가 다른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군요. 오, 주님. 내가 그 사랑에 완전히 무너지기를 소망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허락하고, 그 사랑을 흡수하고,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님의 참 양식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믿는 사람의 귀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 이름은 믿는 자의
슬픔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하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How sweet
the name of Jesus sounds,
in a believer’s ear!
It soothes his sorrows,
heals his wounds,
and drives away his fear.

– 존 뉴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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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ffort72
effort72
2 years ago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그 사랑으로 저를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ffort72
effort72
2 years ago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해 오신 참 생수이신 예수님!
상처와 분노, 고통과 쾌락,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허덕이며 살았던 인생입니다.
사단이 주는 거짓된 가르침에 노예가 되어 내 인생을 방치하고 내 버려두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참 가치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잣대로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늘 비교의식과 열등감 속에 시달리며, 인생의 목자가 없음에 한탄했습니다.
영원한 생수로 오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참 목자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내 인생에 도울 자가 아무도 없어도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더 깊이 오셔서 더 온전히 만져주시고 고쳐주옵소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가운데 영원히 거하게 하옵소서.
영원한 반석이며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octavier
octavier
5 years ago

생수이신 주님. 먼지와 같이 작은 존재인 저를 먼저 사랑하셔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주님. 주님을 인생에서 마주하는 순간마다 한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읺으셨던 나의 아버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먼저 사랑하셨을 깨닫지 못하고 나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의 틀을 깨주심에 감사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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