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DAY 4 – 솟아나는 샘물

HAGAH OF THE LESSON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NIV)

KEY QUESTION

  • 이 우물은 깊다고 말한 여인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 야곱의 우물과 물 길을 그릇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 이 땅의 우물과 하늘의 우물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나의 우물과 나의 물 길을 그릇은 무엇이었을까요?
  • 하늘의 우물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걸까요?
한 절로 한 주 '하가'하는 이유 펼쳐보기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거죠. 상황이, 환경이, 감정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이 돼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려면 한 절의 말씀이라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인상 깊은 구절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생각날 때마다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때 그 말씀을 접하며 받았던 감동과 인상을 암송할 구절 한 절에 압축하여 함께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즉, 암송은 한 절을 하지만 그 절을 품고 있는 전체 컨텍스트 혹은 감동을 그 한 절에 압축하여 기억하는 거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전체 컨텍스트를 한 절(節)로, 한 절을 다시 한 구(句)로, 한 구를 다시 한 단어(單語)로 압축하여 기억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이런 훈련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서 한 단어만 떠올려도 그 단어를 품고 있는 구와 절과 전체 컨텍스트가 함께 살아나거든요. 주님이 말씀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칠 재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씀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그 절(또는 구나 단어)을 수시로 떠올립니다. 밥을 먹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자꾸 말씀을 입술에 끄집어 올립니다. 이때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다란 느낌을 갖고 중얼거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면 내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읽는 주체가 되면, 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말씀조차 믿음으로 중얼거리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삶의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가 바로 이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의 지혜요, 하가의 유익입니다.

‘한 절로 한 주 하가하기 (A VERSE A WEEK, AVAW)’는 이런 배경 아래 시작됐습니다.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주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의 재료를 공급해 드립니다.

DAY 4

[AVAW-치유와 회복]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 솟아나는 샘물 –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야만 했다면
나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에게 최상의 때는
언제나 지금일 수 있습니다.

– 데일리하가 –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틀에 갇혀 있기 쉽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하면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상처만큼이나 우물이 깊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물의 깊이가 30미터 정도 됐으니 깊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이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 물 길을 그릇도 없이 어떻게 생수를 주겠다는 것일까란 생각을 한 거죠.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요 4:11)

이 우물은 깊은데…

주님은 물질의 영역에 속한 물이 아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의 영역에 속한 생수를 얘기하셨지만, 이 여인은 자기가 필요한 물로 바꿔 이해했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영의 영역에 속한 거듭남을 말씀하셨지만, 니고데모는 “어떻게 다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육신의 영역으로 바꿔 이해하고 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의 영역을 알려주셔도 우리가 자기만의 틀에 갇혀 있다면 육의 관점으로 영의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이 바라보는 우물과 이 여인이 바라보는 우물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육체의 한계에 갇힌 모든 인류의 한숨은 이렇습니다.

이 우물은 깊은데…

이 우물의 깊이 만큼이나 육신의 한계에 갇힌 자의 절망의 한숨도 깊기만 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신 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우물을 봅니다. 육신의 눈으로 우물을 볼 때 도구가 없이는 결코 이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우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야곱의 우물입니다. 율법의 상징입니다. 물 길을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는 것이 바울이 은혜와 대조를 이뤄 설명한 율법의 근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도우려 한 결과로서의 이스마엘 출산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라 말합니다.

야곱의 우물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할 근원이며 물 길을 그릇은 그 근원에 접근하기 위한 자신의 수고와 도구와 과정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 야곱의 우물은 성공일 수도 있고, 대의명분일 수도 있고, 자녀교육일 수도 있고, 꿈의 성취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고 싶어 찾는 우물이 있는 겁니다. 물 길을 그릇은 이 근원에 다다르기 위한 수고와 노력이죠. 저마다의 우물, 저마다의 물 그릇. 여기에 몰입되어 있는 한 영적인 것을 얘기해도 육적으로 해석하고 맙니다. 주님이 바로 앞에 섰지만,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도 그랬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절대 의존하는 것이 아닌 상태. 자신은 애쓰고 주님은 그것을 도와줬으면 하는 상태. 좋은 결과를 얻고나면 그것으로 주님을 위하겠다는 생각. 자신의 힘이 살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마엘을 출산하는 율법의 패러다임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이 다 소진되고 나서야 은혜의 아들을 얻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은혜는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 땅의 우물밖에 모르는 여인에게 하늘의 우물을 소개하기 위해 주님은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두 가지 우물이 있습니다. 땅의 우물에서만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자에게 물 길을 그릇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근원에 다다르기 위한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방법이죠. 율법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이 여인에게 물 길을 그릇은 깊은 우물에 다다르기 위한 ‘자격‘이었습니다. 자신의 자격을 이용하여 근원에 다다르려는 모든 노력. 율법입니다. 평생 자신의 힘으로 물을 길으려 했던 여인에게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틀에 갇혀 있었던 거죠. 이때 주님은 땅의 우물이 아닌 하늘의 우물을 소개하며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율법에 속한 구약의 제사는 드려도 드려도 목마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단번에 이루신 은혜의 제사는 영원합니다. 주님은 물 길을 그릇 없이 어떻게 생수를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 여인에게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우물은 물 길을 그릇을 사용하여 길어 올려야 했지만, 하늘의 우물은 물 길을 그릇이 없어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솟아나는 물이니까요. 샘물의 ‘샘’은 헬라어로 우물을 뜻하는 ‘페게’입니다. 즉, 하늘의 우물을 뜻합니다. 땅의 우물은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접근했습니다. 율법의 세계관에 갖혀 있을 때 사람은 물 길을 그릇을 통해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할 근원에 이르려 합니다. 하지만 은혜의 세계관에서 하늘의 우물은 사람의 힘이 필요 없습니다. 물이 하늘의 근원으로부터 솟아나니까요.

야곱의 우물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율법은혜의 대조입니다. 육체의 깊은 샘에서 선한 것을 길어 올리기 위해 수고하는 인생이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이었고 우리였습니다. 육체 안에서 끊임없이 자격과 조건을 고민합니다. 물 길을 그릇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근원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하여 그 근원에서 물을 길어 올렸어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영원한 만족이 없습니다. 율법에 속한 구약의 제사처럼 말이죠.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하나님이 벌주실 거란 오해를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쏟을 모든 진노를 십자가상에서 자기 아들을 버리심으로 모두 쏟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모두를 위해. 그래서 이사야를 통해 전에는 노하셨지만, 주의 진노가 돌아설 것을 예언하시며 구원이 임한 그 자리에 하늘의 우물이 있고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1~3)

이 하늘의 우물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겁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포함하여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상처를 십자가로 가져와 자기 죽음으로 대신 짊어지십니다. 그리고 옆구리에 창을 찔림으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첫째 아담의 옆구리에서 신부인 하와가 나오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가 나옵니다. 쏟으신 피로 영원히 죄를 제거하고, 쏟으신 물로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이 나오더라 (요 19:34)

옆구리에서 쏟으신 물예수님이 교회에 주는 물이며 이 물은 교회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물물이 됐습니다. 이 물의 근원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면 우리의 수치와 치욕과 죄와 모든 상처를 완전히 처리했다는 영원한 증거인 주님의 옆구리 상처를 만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생명의 샘(원천, fountain)이 주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 36:8~9)
9. For with you is the fountain of life; in your light we see light. (NIV)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믿는 자의 깊숙한 곳(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7~39)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배’의 헬라어 ‘코일리아‘는 ‘자궁(womb)‘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생명을 머금는 지점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샘물의 근원입니다. 이 생수의 강은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와 모든 것을 살려내며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겔 22장)이 된 그 강과, 요한이 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본 생명수의 강(계 22장)과 다르지 않은 샘물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흐르지 않는 물이지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흐르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물 길을 그릇이 필요하지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솟아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로마이‘는 ‘튀어 오르다 (to spring up, to leap)‘를 뜻합니다. 이 물은 어느 정도로 튀어 오를 수 있을까요? 영원의 깊이 만큼, 내 삶의 죽어 있는 영역을 모두 살릴 만큼,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될 만큼 튀어 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며 물 길을 그릇으로 퍼 올리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율법은 노력으로 이루려 하지만, 은혜는 믿음으로 거저 받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영역에 영원으로부터 튀어 올라 솟은 샘물은 내 믿음을 타고 생수의 강이 되어 내 존재와 내 삶과 내 주변까지 능히 차고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주님. “이 우물은 깊은데…”라고 말하며 땅 밑밖에 보지 못하는 제 눈을 열어 하늘을 보게 하소서. 땅의 우물에 갇혀 하늘의 우물을 말씀하셔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바로 눈앞에 주님이 계심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육신의 목마름에만 갇혀 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나만의 틀에 갇혀 주님이 내 안에 계심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밖의 우물만 찾고 있는 제 눈을 밝히소서. 주님을 보게 하소서. “이 우물은 깊은데…”라고 말하는 우물의 깊이 만큼이나 깊은 나만의 견고한 한계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육체의 깊은 샘에서 선한 것을 길어 올리려 수고했던 모든 발걸음을 멈춥니다. 물 길을 그릇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불신을 회개합니다. 가장 좋은 것까지도 율법의 힘으로 성취하여 주님께 드리려 했던 무지를 회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솟아나는 샘물을 경험하지 못해서입니다. 믿는 자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약속하신 주님. 원합니다. 믿음으로 이 말씀 위에 섭니다. 나의 남편을 처리하시고 샘의 근원을 터뜨리소서.
  • 당신의 옆구리에서 쏟으신 피와 물. 그 쏟으신 피가 내 죄를 영원히 제거했고, 그 쏟으신 물이 내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합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고, 주의 빛 안에서 참 생명의 빛을 보게 하소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구쳐 튀어 올라 내 삶의 죽어있는 영역을 모두 삼키시고, 능히 건너지 못할 강만큼 흐르사 내 삶과 주변의 모든 영역까지 당신의 생명으로 차고 흘러넘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예수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나로 그 안에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모든 영광을 잃으셨습니다.

You don’t really know
Jesus is all you need
until Jesus is all you have.
Jesus lost all his glory
so that we could be clothed in it.

– 팀 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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