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DAY 5 –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HAGAH OF THE LESSON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But whoever drinks the water I give him will never thirst. Indeed, the water I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NIV)

KEY QUESTION

  • 왜 남편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예배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됐을까요?
  • 생수를 얻으려면 무엇이 먼저 드러나야 합니까?
  • 예수님이 제시하신 생수를 마시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절로 한 주 '하가'하는 이유 펼쳐보기

하가를 하는 이유는 말씀을 매개로 주님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거죠. 상황이, 환경이, 감정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이 돼야 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상생활에서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말씀이 떠오르지 않으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려면 한 절의 말씀이라도 암송하고 있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인상 깊은 구절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생각날 때마다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때 그 말씀을 접하며 받았던 감동과 인상을 암송할 구절 한 절에 압축하여 함께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즉, 암송은 한 절을 하지만 그 절을 품고 있는 전체 컨텍스트 혹은 감동을 그 한 절에 압축하여 기억하는 거죠.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전체 컨텍스트를 한 절(節)로, 한 절을 다시 한 구(句)로, 한 구를 다시 한 단어(單語)로 압축하여 기억하는 훈련을 해보세요. 이런 훈련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에서 한 단어만 떠올려도 그 단어를 품고 있는 구와 절과 전체 컨텍스트가 함께 살아나거든요. 주님이 말씀을 매개로 삶에 영향을 미칠 재료가 풍성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말씀이 익숙해지면 일상생활 언제, 어디서나 그 절(또는 구나 단어)을 수시로 떠올립니다. 밥을 먹다가도, 쉬는 시간에도,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자꾸 말씀을 입술에 끄집어 올립니다. 이때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는다란 느낌을 갖고 중얼거립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면 내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말씀이 나를 읽는 주체가 되면, 내 현재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말씀조차 믿음으로 중얼거리는 어느 순간 그 말씀이 삶의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가 바로 이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의 지혜요, 하가의 유익입니다.

‘한 절로 한 주 하가하기 (A VERSE A WEEK, AVAW)’는 이런 배경 아래 시작됐습니다. 데일리하가는 한 절의 말씀으로 한 주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의 재료를 공급해 드립니다.

DAY 5

[AVAW-치유와 회복]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이
단순하지 않아서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전부가 될 때
주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 데일리하가 –

1. 상처가 치유되면 영적 목마름이 올라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생수를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했습니다. 생수를 요청했는데, 남편이라니요? 아주 이상한 대화 전개였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생수’를 요구했고, 주님은 ‘여인의 남편’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생수에 대한 값을 남편으로 치르게 하시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물’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남편’을 요구합니다. 주님이 요구한 우리의 남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 이외의 것을 만족으로 삼는 모든 것이 바로 세상의 남편입니다. 세상의 남편이 주는 물은 잠시 시원할 뿐 마실수록 목마릅니다. 채우지 못한 만족을 찾고자 대상을 바꾸지만, 이 여정의 결과는 수치, 죄책감 그리고 상처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요 4:10)을 주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남편을 요구하십니다. 잘못을 들추고 정죄하고 가르치기 위해 숨기고 싶은 남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상한 어깨 위에 기름을 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생수 주기를 갈망하시지만, 쓴 뿌리 위에 생수를 부으면 결국 오염된 물로 우리가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잘 아시기에 정오의 우물가에서 우리를 만날 때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상처가 가장 위험합니다. 일단 상처가 드러나면 아프지만, 치유가 시작됩니다. 어둠은 빛에 드러날 때 사라집니다. 진정한 생수를 경험하기 위해선 ‘진짜’ 남편 앞에 ‘이전’ 남편을 드러내고, 인정해야 합니다. 진짜 남편이신 주님은 이 부분을 놓고 가장 은밀하게 처리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일대일의 상황을 연출하셨습니다. 내 삶에 생수로 상징된 성령의 생명의 역사가 풀리려면 가장 은밀한 시간 찾아오셔서 남편이 없다고 주장하는 내게 남편을 폭로하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일대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통해 드러난 남편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인정할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만일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신다면 조롱하거나 정죄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치유와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임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정직하게 자신의 은밀한 상처를 직면하고 인정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는 상처로 인해 막혔던 영적 혈관이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은 남편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예배’로 대화를 전환합니다.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16~20)

남편 얘기를 하다 말고 예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대화 흐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처로 인해 막혔던 영적 혈관이 뚫린 결과였습니다. 인간 안에는 누구나 영원을 향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다만 죄로 인해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오랜 세월 이 여인의 영적 목마름을 누르고 있던 상처 위에 주님의 드러내는 빛이 임하자 어둠이 한순간 걷히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세상을 향한 목마름과 세상이 주는 물에만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던 여인에게 갑자기 하늘을 향한 목마름이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이 예배에 관한 궁금증으로 나타난 것이죠.

2. 생수를 마시는 비결,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주님은 지금까지 몇 수 앞을 내다보며 포석(布石)을 두고 계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하나님의 선물’, ‘생수를 주겠다’, ‘남편을 불러 오라’란 말을 통해 자연스레 여인의 영적 갈망을 일으킨 후 이제 주님이 정말 말씀하기를 기다리셨던 수를 두실 차례입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1~24)

주님은 이 말을 통해 우리에게 생수를 어떻게 얻고 마시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가장 먼저 ‘물’을 화두로 대화를 전개하셨습니다. 주님이 주기 원하셨던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에 있는 물은 물 길을 그릇을 통해 얻고 마시면 됐습니다. 그렇다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어떻게 얻고 어떻게 마십니까? 본문의 전체 흐름은 주님이 생수를 주기 원하는 것이고 그 맥락 중에 예배에 관한 얘기가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여인이 물리적 목마름에서 영적 목마름으로 전이된 가운데 예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주님은 이것을 이어받아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생수를 얻고 마시는 방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예배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산에서 예배드려야 할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할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종교적 틀에 갇힌 사람 편에서 고안해낸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접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배로는 결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생수를 얻고 마시는 비결로 제시하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의 근원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영 안에서 예배

많은 사람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예배드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마음 중심으로 간절히 드려야 할 예배드리는 자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생수의 비결로 제시하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만연해 있던 예배와 관련한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장소‘와 하나님이 명령하신제물‘입니다. 성전에 주님이 거하고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주님이 택한 장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었으므로 반드시 주님이 정한 제물로 주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신 12:11)

하지만 구약의 예배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실제‘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당시 대부분 종교인과 다르지 않게 율법의 틀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영적 해갈을 놓고 하나님이 택하신 물리적 ‘장소’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할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할지를 궁금해한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림자는 실제가 아닙니다. 실제가 나타날 때까지 실제를 추측할 수 있는 모형(模型)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전 그 자체(요 2:19~21)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전의 실제가 오신 겁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19~21)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통해 그동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던 물리적인 성전은 더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성전의 실제니까요. 하지만 주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은 성전이신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가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리적 제약의 상징인 성전이셨던 주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헐어 버리십니다. 더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물리적 장소가 의미 없음을 주님의 죽음으로 확증하신 겁니다. 그리고 죽음의 모든 제약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더 탁월하고, 더 좋은 예배 장소를 마련하십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의 예배 장소가 새 언약 아래에서의 예배 장소로 변하는 획기적인 장면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장소는 바로 물리적, 시간적 제약을 더는 받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지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 거주하십니다. 바로 주님이 거주하는 그곳새 언약 아래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장소입니다. 그림자였던 물리적 성전의 실제가 주님의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영이 거주하고 계신 믿는 우리가 바로 성전인 것을 알려 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명확하게 ‘영’ 안에 하나님의 거주지, 즉 그림자였던 성전의 실제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이 영이 새 언약 아래에서의 예배 장소입니다. 더는 예배장소가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in whom you also are being built together into a dwelling of God in the Spirit. (NASB)

한글 성경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고 번역했지만, 이 부분의 헬라어 원어 ‘엔 프뉴마티‘는 말 그대로 ‘영 안에‘ 입니다. 즉,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분이 거할 장소를 찾고 계셨고, 그것이 구약에서는 그림자로서 성전이었다면, 이제 그 그림자의 실제인 ‘영’ 안에 그분이 거할 장소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한글 성경은 ‘영으로 예배할지니라’인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데 이 부분의 원어는 에베소서 2장 22절 말씀과 똑같이 ‘엔 프뉴마티‘를 사용했습니다. 즉, ‘영 안에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배를 드리라는 태도적 의미가 일차적 초점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또한 이 교회 건물에서도 말고 저 교회 건물에서도 말고, ‘영’ 안에 그림자의 실제인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있으니 이제는 ‘그 영 안에서’ 예배하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백성들이 주님을 예배하려면 ‘성전 안‘을 향해 가야 했듯, 이제 새 언약 아래에서 주님을 예배하려면 ‘영 안‘을 향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주일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할 때 가장 먼저 건물로서의 교회, 즉 물리적 장소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영 안’을 향하여 간다는 것이 생소하고 다소 신비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명확하게 ‘엔 프뉴마티‘, 영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요.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일에 교회 건물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영 안에 있어야지만 예배를 드린 겁니다. 주님은 이렇게 영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섬기려면 그림자였던 물리적인 장소가 아닌 실제인 영 안으로 가야 합니다.

‘영 안에’와 관련해서는 광범위하게 다뤄야 할 이야기가 많지만 아주 간략히 핵심만 설명하면요. 영 안에 있다는 것내 안에 실재(實在)하는 영을 인식하고, 매 순간 그 영에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독립하여 자기만의 특별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면 공간의 영향을 받습니다. 공간은 라이프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영이 주님과 함께 하는 매우 특별한 영적인 공간임을 깨닫고, 인식하고, 인정하고 내 라이프스타일 전체가 이 공간의 영향을 받게 되면 우리는 이 영 안에 있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아프리카 안에 있으면 그 나라의 법과 공간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이 영 안에 있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과 그 공간의 영향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4. 진리 안에서 예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서 ‘영’과 관련하여 살펴봤다면 이제 ‘진리’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도 원어에 근거하여 해석한다면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기 보다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의 근원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말씀 안에서, 거짓되지 않게, 바르게 예배 드려야 한다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로 옛 언약 아래에서의 예배 개념에 사로잡혀 있던 자에게 새 언약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예배를 주님이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전까지는 하늘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였습니다. 실제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오셔서 가려진 것의 실제를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가려져 있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레데이아(LETHEIA)’에 부정(否定) 접두사 ‘아(A)-‘를 붙이면 ‘진리(眞理)‘를 의미하는 ‘알레데이아(ALETHEIA)‘가 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많이 사용하던 단어인 ‘알레데이아’는 원어적으로 ‘감춰진 것이 드러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알레데이아’를 ‘진리’란 뜻 이외에 ‘사실로 드러남‘ 또는 ‘실제(reality)‘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앞서 구약의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었는데요. 이중 하나님이 택하신 그림자였던 물리적인 장소가 그 실제인 ‘영’으로 바뀌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제물’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드리면 드릴수록 목이 말랐습니다. 제물을 통해 죄를 가리는 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제물 역시 그림자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그림자의 실제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영원한 만족을 이루십니다.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2~26)

옛 언약 아래에서는 제물의 실제가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감춰져 있던 제물의 실제(알레데이아, 제물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드러난 실제를 ‘참(truth)‘이라 불렀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것을 ‘알레데이아‘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모든 것은 그림자요 예표(豫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감춰져 있던 것의 실제를 모두 드러내시기 시작했습니다. 영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라는 것은 그림자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요. 제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죄를 덮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자로서의 구약의 제물은 이 죄를 영원히 덮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물의 실제이신 예수님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 죄의 문제를 덮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참입니다. 진리입니다.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주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들어와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서게 됐다면 이 사람은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안에서, 진리(알레데이아) 안에서 예배드린 겁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진리’의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을 가리키는 단어일지 모르지만, ‘나는 진리요’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진리‘의 정의는 감춰져 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만물은 다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만물은 모두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하는지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습니다. 드러난 것도 있지만, 여전히 감춰진 것도 있습니다. 만물(형이하학과 형이상학 모두를 포함하여)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드러난 사실이 곧 진리입니다. 즉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향해야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결코 진리를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예를 들면요. 가시광선을 통해 볼 수 있는 빛은 물리적인 빛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요한은 이 빛의 실제이신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소개합니다.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디노스(형용사, truthful)’는 ‘알레데이아(명사, truth)’와 어근을 같이합니다. 가려진 것의 드러남을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9)

보이는 빛 아래 감각을 의지하며 살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말씀을 보다 큰 깨달음을 얻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경배합니다. 이때 이 사람은 참 빛을 비춰 깨닫게 하는 빛의 실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알레데이아) 안에서 예배드린 겁니다.

사람은 매일 양식을 먹으며 삽니다. 이 양식, 떡은 그림자입니다. 물리적 양식이 참 양식이 아닙니다. 그림자일 뿐이죠. 예수님은 이 떡의 실제이신 예수님을 ‘참 떡‘으로 소개합니다. 이때 ‘참’도 역시 ‘알레디노스’를 사용합니다. 물리적인 떡 안에 감춰져 있던 실제가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2, 35)

영적인 굶주림을 잊은 채 세상의 양식만으로 살아가던 어떤 사람이 광야의 삶을 통해 영적인 굶주림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광야의 한복판에서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 않고는 결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임을 깨닫습니다. 이때 이 사람은 영에 양식을 공급하는 떡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알레데이아) 안에서 예배드린 겁니다.

물리학을 공부하던 어떤 학자가 어느 순간 자신이 공부하던 물리학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물리학의 모든 것 역시 만물의 주인이요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깨달음을 갖고 주님을 경배한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발견한, 그 전공 분야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알레데이아) 안에서 예배드린 겁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만물 안에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 숨어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발견한 실제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는 결코 전통과 종교에 묶일 수 없습니다.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탁월한 의식과 절차를 통해, 그 어떤 탁월한 찬양팀과 설교자를 통해, 그 어떤 탁월한 지식과 깨달음을 통해, 그 어떤 탁월한 신비적 체험을 통해 예배를 드린다 해도 만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진리 안에서 드린 예배가 아닙니다. 마치 주일에 교회 건물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 안에 있어야지만 예배를 드린 것이듯, 섬기는 활동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야지만 예배를 드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겁니다. 주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가 비로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왜 내 삶에는 주님의 선물을 주지 않냐고 원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오해였군요, 주님. 저는 주님이 내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쓴 뿌리 위에 생수를 부으면 결국 내가 다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사랑이었군요. 그토록 생수를 주길 원하시면서도 그때만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 너무나 인자하시고, 너무나 섬세하시고, 너무나 존중하시는 주님. 상한 어깨 위에 기름을 붓지 않으시고, 쓴 뿌리 위에 생수를 주지 않으시는 주님. 이것을 깨달은 지금이 바로 주님의 ‘때’이길 소망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음습한 곳에 가둬뒀던 쓴 뿌리와 상처를 주님의 빛 앞에 드러내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다시 옛 남편으로 돌아가지 않게 도우소서.
  • 주님.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남편을 드러내고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시려는 게 아니었음을 압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화의 끝은 결국 생수를 주는 것이었음을 믿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시는 비결로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주님. 제 안에 고정관념처럼 굳어 있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관한 인식이 있습니다. 그저 마음을 다해 예배를 잘 드려야겠다는 태도에 초점을 맞췄던 제게 주님이 정말로 말씀하기 원하셨던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가르쳐 주소서. 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제게 부어 주소서.
  • 주님. 보이는 물만 찾고 보이지 않는 물이 있다는 것을 자주 놓칩니다. 보이는 예배 장소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영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자주 잊습니다.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 지시고, 그 상처를 통해 새로운 길을 내신 주님. 우리가 이 영원한 공간 안에서 주님을 섬기기 소원합니다. 주일에 교회 건물에 앉아 있다고 예배드렸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내 삶 전체가 이 영의 영향을 받고, 영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로 살게 하소서.
  • 제물의 실제이신 주님. 만물 안에 숨겨져 있는 주님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주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소원합니다. 만물이 가리키고 있는 그 주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모르는 것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아니라, 실제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그토록 찾으시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 주의 생수를 마시는 자로 살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고난과 상실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뜻
정중앙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상실의 시기는
순종으로 가는 길의 표시입니다.

When you suffer and lose,
that does not mean
you are being disobedient to God.
In fact,
it might mean you’re right
in the centre of His will.
The path of obedience is
often marked by
times of suffering and loss.”

– 척 스윈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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