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 고린도후서 3:18 (3) – DO와 DONE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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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GAH OF THE LESSON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DAY 4

[AVAW-Focus on Verse] 고린도후서 3장 18절

아기가 아빠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부를 때
아빠는 큰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하기 전에,
내 안에 실재하는 주님을
믿음으로 인식하고 부르십시오.
믿음의 인식이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 옵니다.
아기의 인식이
곧 아빠의 관심을 가지고 오듯이요.

– 데일리하가 –

KEY QUESTION

  • 변화와 주의 영광을 보는 것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 무엇인가를 하려는 'DO'와 다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DONE'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지성소에 일반적인 빛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후 3:18 – DO와 DONE의 대결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우리는 변화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거룩해지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자기를 입증하려고 애씁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죄는 사람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다스리고 노예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죄는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자 애씁니다.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뒤처지는 것 같습니다. ‘거룩’과 관련해서도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듭니다. 율법의 속성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뒤에 죄가 있고 그 뒤에 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린도전서 15:56)

죄는 사람의 생명이 소진될 때까지 요구합니다. 사망에 이르러야 이 요구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무의식 가운데 이 요구에 응하려 애쓰고 입증하려 애씁니다. 마귀가 이미 구원을 얻은 크리스천을 묶어둘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은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을 통해 ‘주의 영광을 볼 때’ 변화되는 것(are being transformed)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변화에 관한 어떤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아닙니다.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변화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성경 모델에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지성소입니다. 성전 바깥 뜰은 태양 빛 아래 있고, 성소 안은 등대 빛 아래 있지만, 지성소에는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깥 뜰과 성소까지는 사람의 감각으로 빛을 인식하고 그 어떤 일을 하는 곳이지만, 지성소에서는 사람의 감각과 그 어떤 노력도 모두 무용지물인 장소입니다. 영광의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는 지성소. 이 빛은 시신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보는 빛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의 영광을 보는 지성소는 사람의 열심과 노력과 그 어떠함이 모두 안식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바울이 얘기한 변화는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변화에 초점을 맞춰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으로 주의 영광을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어느 순간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야다)… (시편 46:10)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KJV)
Cease striving and know that I am God… (NASB)

나쁜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에서 나온 모든 좋은 것 역시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악(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善)’도 함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는 언제나 서로 응전(應戰)합니다. 이 죄의 요구에 무지할 때, 하나님이 다 이루신 은혜를 놓친 채, 무엇인가를 입증하기 위해 애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자격을 다 갖추셨음에도 어떤 자격을 갖추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내가 율법의 요구대로 노력한 만큼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은혜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격에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이미 완벽히 지불 하셨음을 믿는 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율법과 은혜의 응전(應戰)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vs. 생명 나무
  • 노력 vs. 안식
  • 요구와 자격을 갖추는 삶 vs. 공급과 이미 이뤄진 삶
  • 죄 vs. 의

이는 곧 무엇인가를 하려는 ‘DO’와 다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DONE’의 대결입니다.

죄 아래서 사람은 ‘하려는(DO)’ 존재이고 은혜 아래서 사람은 ‘다 이루신 것(DONE)’을 알아가는 존재입니다. 고급 뷔페가 이미 포함된 크루즈를 타고서도 값 지불된 것이 무엇인지 몰라 뷔페를 먹기 위해 자신의 값(노력)을 다시 지불하려는 것(DO)은 어리석습니다. 이미 지불된 것(DONE)을 알 때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활성화시키는 ‘아는 것(계시)’을 강조하고 이 믿음에 기인한 ‘DO’만을 의롭게 여깁니다. 이때의 ‘Do’는 율법적 노력과 다릅니다. 이미 다 이루신 ‘Done’에 감격한 반응으로서의 ‘Do’입니다.

성화(聖化)는 거룩과 변화에 관한 단어입니다. 영의 구원이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관계있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르는 혼의 구원은 ‘성화(聖化, sanctification)’와 관련 있습니다. 영의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혼의 구원인 성화 즉 거룩과 변화 역시 나의 노력이 아닌 주의 영광을 보며 이미 이루신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믿음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저 주의 영광 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때 어느 순간 변화된 나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렇게 기도해보면 어떨까요?

  • 나를 위해 이미 모든 값을 지불하신 주님. 주님이 이미 값 지불하신 것에 내가 다시 값 지불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주님의 값 지불을 헛되게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나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입증하려 하고, 내 힘으로 변화하려는 모든 노력을 멈추게 하시고 주님의 아름다움과 주의 영광을 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저 주의 영광을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 ‘나의 변화는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란 간증을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죄와 율법이 ‘DO’를 요구할 때마다 분별하게 하시고, 주님의 ‘DONE’을 발견해 가는 자로 살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이 주신 감동을 함께 기도하면 어떨까요? 성령을 의지하여 내게 주신 울림을 쓰고, 나눌 때 기름부음은 배가됩니다. 저마다의 기도가 주의 영으로 합쳐져 주님 앞에 가장 귀한 향으로 올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여 ‘댓글 달기’를 통해 자유롭게 기도해주세요.

<함께 기도하기>에 참여하기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기쁜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이 대화를 연습하고
경험하는 사람만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There is not in the world
a kind of life
more sweet and delightful,
than that of a continual conversation
with God;
those only can comprehend it
who practice and experience it.

– 로렌스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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