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 실전] WEEK 1 – SOAR란 무엇인가?

[
HAGAH OF THE LESSON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S

Still&Sync

WHO
누구를 볼 것인가?
---
기도

O

Outline&Observe

WHAT
무엇을 말씀하시나?
---
관찰/해석

A

Align&Author

HOW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
적용

R

Reflect&Respond

WHY
왜 사는가?
---
계시

KEY QUESTION

  • 상황을 해석하는 힘이 관점(觀點)에 달렸고 관점이 고도(高度)에 달렸다면 이 고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나님이 알려주신 묵상 방법인 ‘하가’에 관해, 이 ‘하가’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하가’의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가’를 권면하신 이유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을 하늘의 관점으로 바꾸기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지금부터는 요셉과 마리아와 다윗의 사례를 통해 관점의 고도(高度)를 높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

요셉과 다윗 모두 주님이 높여 주시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시련을 거쳤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한 요셉.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매일 매일 죽음의 위기에서 주님 한 분만을 붙들고 살아가던 요셉. 세상은 그를 노예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요셉을 성공한 자로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한 분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던 요셉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 39:2, NASB 번역)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became a successful man. (NASB)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자기를 바라보면 실패한 노예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 보좌 위로 올라가 바라보면 그는 성공한 자였습니다. 현실에서 총리라고 하는 성공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주님은 언제나 앞서 보시는(여호와 이레) 분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메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로 분석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이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실 때 거인을 삼키는 자로 믿으셨습니다. 유일하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믿고 계신 것을 믿음으로 취한 자들입니다. 한 편은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자기를 바라봤지만, 또 다른 한 편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대로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갈렙은 가나안 땅 거인들을 향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이 내 통제 밖에서 벌어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일어난 사건이나 현재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이 해석을 좌우하는 것관점(觀點)이며 그 관점은 현재 내가 밟고 있는 고도(高度)가 좌우합니다. 문제와 함께 서 있으면 문제가 커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 보좌 위로 오르기만 한다면 주님이 커 보일 뿐 그 문제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정도로 작게 보입니다.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간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런 사건이 발생했죠.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평생 형들을 원망하며 우울증 가운데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과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항상 의식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으려 했습니다. 여러 시련을 겪는 가운데 요셉은 날마다 자신의 고도를 높입니다. 그런 어느 날 자신을 배반했던 형들이 눈앞에 섰습니다. 벌어진 사건과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형들을 원망하며 앙갚음을 하려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요셉은 문제와 함께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석을 달리합니다.

창 45:4~5, 7~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벌어진 사건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온전한 해석은 관점에 달려 있고, 이 관점은 자신이 밟고 있는 고도에 달렸습니다.

요셉은 주님 한 분을 앙망(仰望)하며 바라봤던 자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SOAR) 같을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을 앙망할 때 상황을 해석하는 고도가 올라갑니다. 이렇게 고도가 올라간 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 40:31)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 (NIV)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처녀 상태에서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란 소식을 듣습니다.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 염려하며 좌절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관점이 다른 마리아는 벌어진 사건 해석을 달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 한 분만을 앙망하며 찬양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6~47)
And Mary said, My soul does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s rejoiced in God my Savior. (KJV)

‘찬양하다’에 해당하는 KJV 번역은 ‘확대하다’를 의미하는 ‘magnify‘를 사용했습니다. 문제를 확대하면 좌절이 오지만, 주님을 확대할수록 찬양과 기쁨이 넘칩니다. 내가 ‘무엇을 확대하는가’는 고도의 문제입니다. 벌어진 사건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무엇을 확대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윗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이방 땅 가드로 피신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가드 왕 아비멜렉 앞에서 침 흘리며 미친 척을 합니다. 다윗 인생에 있어 얼마나 수치스러운 장면이었을까요? 다윗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다윗이 돌아와서는 주님 한 분만을 앙망하며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1)

시편 34편 부제를 찾아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과 문제를 확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이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시 34:3)
O magnify the LORD with me, and let us exalt his name together. (KJV)

‘광대하시다’에 해당하는 KJV 번역은 마리아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확대하다’를 의미하는 ‘magnify‘ 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의 상당수가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이유는 다윗이 언제나 상황을 보지 않고 찬양을 통해 고도를 높여 주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하가와 SOAR

사건을 일으킨 문제가 커 보이는 이유는 그 문제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눈높이가 같으면 그 문제의 영향을 받습니다. 고도를 높이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서 취하려면 실패합니다. 언제나 이 자원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 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는 ‘하가’를 통해 고도를 높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의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데일리하가는 하가를 통해 관점의 고도가 비상(飛上)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SOAR 관점(觀點)을 제시합니다.

Still &
Sync

기도


WHO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 것인가?

Outline & Observe

관찰/해석


WHAT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Align & Author

적용


HOW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Reflect & Respond

계시


WHY

왜 나는
이 땅에 존재하는가?
방법도 중요하지만...

‘하가’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하가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에 잘 적용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의 정답을 찾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문제 해결을 얻고 싶어 하죠. 너무나 정상적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이렇게 누리길 원하실 겁니다. 하지만 말씀이 단순히 읽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요 인격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아, 말씀이신 주님과의 교감과 교제는 빠진 채 뭔가를 일방적으로 얻고만 싶어했구나…’란 생각에 가슴 철렁할 때가 있습니다. 사귐의 대상이 분명히 있는데 일방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접근이었던 거죠. 이런 경향이 남아 있어 우리는 계속 말씀을 읽으려고만 합니다. 그런 활동을 통해 뭔가를 얻고만 싶어하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사귐의 균형을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를 읽을 기회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진짜 사랑하면요, 요구하기 전에 먼저 듣고 싶어 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더 알고 싶고, 더 교제하고 싶은 마음. 바로 이 마음으로 말씀이신 주님에게서 들으려 할 때 그 과정에서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깨달음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문제 해결을 부산물처럼 얻는 거죠.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이게 자연스럽습니다. 방법론을 적용해가며 사랑하는 것은 어색합니다. 사랑은 방법을 이깁니다. 진짜 사랑하면 창의적인 방법까지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가를 하는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내가 말씀을 소중히 여길수록 그 말씀이 나를 또한 존중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삼상 2:30)
…Those who honor me I will honor… (NIV)

결혼 후 태어난 첫째 아이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모두에게 시간은 다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이렇듯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도 존재합니다. 이 시간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결국, 태도가 경험의 질을 좌우하죠. 하가를 하는데 있어서도 하가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방법론이 아닌 말씀을 향한 마음 중심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매개로 우리와 친밀하게 교감하고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사랑은 생산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생각하기 이전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모든 제약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관점이나 방법론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첫 단추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의 행간 마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도구와 방법론이 그 사랑을 더 넓고 풍요롭게 해줍니다. 이미 마음 중심에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태도를 갖춘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도구와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더 알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어 도구와 방법론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방법론이 결코 그 사람을 틀에 가두지 못합니다.

하가를 좀 더 잘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나 도구에 몰입하다 보면 정작 관계의 대상을 잊고 맙니다. 본말(本末)을 전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되겠습니다. 정상(頂上)에 오르는 길은 아주 다양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길도 다양합니다. SOAR는 데일리하가가 정상을 오르며 개척했던 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길이 익숙해질 때까지 참고하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과감히 버리시고 언제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시길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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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ce
Joyce
3 years ago

말씀이 우리를 읽을 기회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씀이 제 마음에 긴여운을 남깁니다
분주한 마음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말씀을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가 아니고
날마다 만나서 교제하기 위해 하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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