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 기초] WEEK 3/DAY 2 – ‘하가’가 ‘형통’을 산출하는 이유 – 믿음과 영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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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GAH OF THE LESSON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KEY QUESTION

  • 하나님은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왜 ‘하가(HAGAH)’를 강조하셨을까요? (4)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입에서 말씀을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하가’하라고 하신 이유는 결국 말씀이요 인격이신 주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형통이요, 성공입니다. 주님이 함께 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하가’가 이런 형통을 산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이 들어오고 영의 생각을 출산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하가’는 믿음을 가져옵니다

의지적인 믿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은 언제나 들어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NIV)

믿음은 내가 의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믿음은 오는 것(Faith Comes From…)‘이라고 번역합니다. 의지를 사용한 믿음은 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하늘(말씀)에서 와야 합니다. 글자였던 말씀이 인격으로 다가와 그 인격 앞에 자복하며 큰 감동을 받을 때 믿음은 ‘들어 오는 것’입니다. 어디서 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확대 해석하면,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자 믿음의 원천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신 주님이 내 심령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함께 믿음이 들어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上)

잠언은 믿음의 원천인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카샤브)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잠언 4:20)
My son, pay attention to what I say; listen closely to my words. (NIV)

‘주의하다’를 NIV는 ‘집중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pay attention to)’으로 번역했습니다.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 대상의 숨겨진 마음마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하다’의 히브리어 ‘카샤브’에는 ‘주의하다’란 의미 외에 ‘귀를 기울여 듣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시편 10편 17절 말씀은 ‘카샤브’를 ‘듣다’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카샤브) (시편 10:17)

‘하가’는 인격이신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카샤브, pay attention to)입니다.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인격이신 말씀이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2. ‘하가’는 ‘영의 생각’을 돕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영적 존재’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영적’이란 말을 들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경건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의 결과일 뿐입니다. ‘영적’이란 말은 삶의 주도권과 관련 있습니다. 아무리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하고 헌신을 한다 해도 내 생각, 이성, 감성, 의지, 경험이 삶의 주도권을 먼저 갖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내 감정이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는 영에 의해 감정이 통제되어 반응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의해 통제되는(spirit-controlled)‘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관해 얘기합니다. 내주하는 영을 따를 때(영적일 때)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5~7)

생각은 감정과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감정과 태도는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행동의 반복이 내 삶을 결정합니다. 삶을 바꾸려면 결국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이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 그리고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갈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옵니다. 영에서 온 생각. 예수님은 말씀(레마)이 곧 ‘영’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요 생명이라 (요 6:63)

즉,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오고, 그 영은 곧 말씀입니다. 글자였던 말씀이 ‘하가’를 통해 인격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영의 소리를 동반한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이때의 생각이 영의 생각이요 이 생각이 믿음을 산출합니다.

이 믿음과 영의 생각이 있을 때, 상황을 자신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에 갇혀 있으면 거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보게 되지만 영의 생각과 믿음이 활성화되면 나 자신이 아닌 내 안에 계신 만군의 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결국 모든 영역의 형통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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