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다

에덴동산은 장막의 원형이다. 히브리어로 ‘동산’은 ‘간’이다. 의미는 ‘울타리’. 울타리 쳐진 장막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장막의 원형인 에덴동산을 섬기던 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다. 관련 구절을 살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간)두어(야나흐) 그것을 경작하며(아바드) 지키게(샤마르) 하시고 (창세기 2:15)
And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to the garden of Eden to dress it and to keep it. (KJV)

1. 제사장은 ‘아바드’ 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온 ‘경작하며’의 히브리어는 ‘아바드’다. 이전에 살펴본 ‘아보다’의 동사형이다. 한국어로 ‘경작하며’로 번역했지만, 이 부분의 히브리어 ‘아바드’는 섬김(to serve)을 통한 예배와 일을 강조한 단어다. ‘경작하며’를 떠올리면 얼핏 땀흘리는 노동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구절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이다. 아담은 노동으로서의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섬긴 것(아바드)이다. 아담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 마음으로 늘 섬겼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았다. 아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땅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땅을 섬겼다. 그것이 곧 섬김으로서의 일(아보다)이요 예배(아보다)였다.

KJV 성경은 이 부분을 ‘to dress (옷을 입히다)’로 표현했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담에게 있어 ‘경작하며’는 노동이 아니었다. 땅을 가꾸고, 아름답게 옷을 입히는 거였다. 섬김(아보다)이었다. 유치원 등원하는 딸 아이의 머리를 묶어주고 예쁜 옷을 입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사랑 가득한 섬김이다. 그것이 예배다. ‘아보다’다. 아담은 이와 같은 마음으로 땅을 예쁘게 가꿔줬다.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 섬겼을까.

‘경작하며’에 해당하는 ‘아바드’는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예배하다’로 번역했다. 그리고 주로 제사장들에게 이 단어를 사용했다. 아담이 제사장의 원형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 있는 땅을 사랑하신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비즈니스 영역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비즈니스 영역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영역을 가꿀(아바드, to dress)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하는 일이 더는 생계를 위해 땀 흘리는 노동이 아닌 사명 위에 선 아보다인 것을 아는 사람. 바로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가장 먼저 창조하시고 제사장의 원형을 보여주신 것에 주목하자.

2. 제사장은 ‘샤마르’ 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온 ‘지키게’의 히브리어는 ‘샤마르’다. 레위 지파 이야기를 다루는 민수기 3장을 보자.

6.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미쉬메레트 – 샤마르에서 파생)와 온 회중의 직무(미쉬메레트)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아보다)하되(아바드) 8.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샤마르)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미쉬메레트)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아보다)할지니(아바드) (민수기 3:6~8)

이 구절 안에 앞서 얘기한 ‘아보다’, ‘아바드’, ‘샤마르’가 모두 들어 있다.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아보다’해야 했다. 이들의 주 직무는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는 것(샤마르)’이다. ‘직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메레트’ 역시 ‘샤마르’에서 온(히브리어 자음 ‘ㅅㅁㄹ’가 같음) 단어다. 직무는 사명과 관련 있다. 사명은 보내신 자가 부여한 목적과 존재 이유다. ‘샤마르’는 이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보내신 자가 부탁한 것이라면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하려는 것. 그것을 성경은 ‘충성’이라 부른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다음 지경이 열린다. 한 고을을 ‘샤마르’한 자에게 열 고을을 ‘샤마르’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아바드) 지키게(샤마르)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셨다. 목적과 이유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땅을 섬기고 가꾸는 것(아바드, to dress), 그것이 곧 예배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지키는 것(샤마르, to keep). 이 두 단어는 모두 제사장을 위한 단어다. 하나님은 아담을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이다. ‘동산’은 히브리어로 ‘간’이고 그 의미는 ‘울타리’라 했다. 지켜야 할 영역이다. 아담이 지키지 못할 때, 제사장 직임을 다 하지 못할 때 죄가 들어 왔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Mission)을 아는 자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을 기록으로 남겼다.

내가 온 것(Mission)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사람들로 꼴을 얻고 생명을 얻도록 ‘아바드’ 하셨다. 섬기셨다. 그것이 그분의 일이며 양식이며 예배였다. 동시에 주님은 목숨을 버리기까지 자신의 양을 ‘샤마르’ 하셨다. 지키셨다. 그것이 그분의 직무(미쉬메레트)였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9~11)

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아담에게 부여하셨던 제사장의 직무를 완벽히 수행하신 것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3. 제사장은 ‘아바드’와 ‘샤마르’보다 ‘야나흐’가 먼저다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온 ‘두어’의 히브리어는 ‘야나흐’다. 그 의미는 ‘안식하다(to rest)’. 안식하는 장소의 원형은 어디인가? ‘지성소’다.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간다.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뿐이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뒀다(야나흐). 그리고 그 동산을 경작하며(아바드) 지키게(샤마르) 하셨다. 에덴 동산에 두셨다는 것의 ‘야나흐’는 쉬게 하는 것이다.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아니다. 경작하고 지키는 것보다 먼저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가? ‘야나흐’다. 왜냐하면, 경작하고 지키는 것이 ‘야나흐’에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바드’와 진정한 ‘샤마르’는 땀을 통한 섬김이어선 안된다.

읽어보기
비즈니스 영역에 제사장이 서야 하는 이유

예수님의 ‘아바드’와 ‘샤마르’는 언제나 한적한 곳에서의 ‘야나흐’에서 왔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5)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마가복음 6:3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누가복음 4:42)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16)

킹덤 비즈니스의 핵심이 무엇인가? 나의 일(My Business)이 아닌 ‘아버지의 일(Father’s Business)’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러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계시가 필요하다. 이 계시는 어디서 오는가? ‘야나흐’에서 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야나흐’를 통해 언제나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했다.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한복음 12:49)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0)

‘안식하게 하다(to rest)’의 의미를 갖는 ‘야나흐’를 왜 ‘두어(to put)’로 번역하는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야나흐’를 성경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곳이 앞서 살펴본 창세기 2장 15절이고, 두 번째로 사용한 곳이 창세기 19장 16절이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야나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창세기 19:16)
… and set him without the city. (KJV)

가인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을 떠나 한 일은 ‘성(city)’을 쌓은 것(창 4:17)이다. 문명의 상징인 ‘성(city)’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의 상징이다. 롯과 그 가족은 ‘성(city)’ 안에 있었다. 롯을 구출하기 위해 간 천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롯과 그 가족을 인도하여 ‘성(city)’ 밖에 두신 것이다. 이 때 성(city) 밖에 ‘두니’는 ‘야나흐’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할 안식의 자리로 옮기셨다. 이것은 위치의 문제다. 롯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 아무리 아버지의 일(business)을 하려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일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위치가 중요하다. 어느 위치에서 ‘아바드’하고 ‘샤마르’할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기 시작부터 하나님의 거주 장소이자 안식처인 장막과 그 장막을 섬기는 제사장의 모델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이 모델을 성경 전체에 걸쳐 지속해서 나타내신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그 절정을 이룬다.

거듭난 이후 우리는 모든 영역에 있어 창조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거듭나 제사장 직임을 회복한 자가 비즈니스 영역에 설 때 그 일은 마이 비즈니스(My Business)가 아닌 아버지의 비즈니스(Father’s Business)여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월급과 생계를 위한 죄의 결과로서의 노동인가? 아니면 부르심 위에 서서 거듭난 창조의 영으로 비즈니스에 ‘옷’을 입히고(아바드, to dress), 비즈니스에 ‘생명’을 입히는 것인가? 땅을 섬기는 것(아보다, service)은 무엇인가?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 비즈니스를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이 아닌 섬김. 그 섬김이 땅을 아름답게 하고, 비즈니스 영역을 밝게 옷 입히고, 사람의 마음에 빛의 옷을 입힐 수 있을 때 그 ‘아보다’(일, service)는 ‘아보다’(예배, service)가 될 것이다. 거듭난 우리가 회복하기를 소망하며 꿈꿔야 할 부분 아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위해 일한다.

If we give God service
it must be
because He gives us grace.
We work for Him
because He works in us.

– 챨스 스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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