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 DAY 5 – 주님은 나를 무엇이라 부르시는가?

HAGAH OF THE LESSON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52)

DAY 5

[바디매오] 주님은 나를 무엇이라 부르시는가?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신,
절박한 자의 간청에 응답하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신,
기적(miracle)의 주인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신다.
소경 바디매오의 곁을 지나셨던 것처럼.
겉옷을 내던지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그저 나를 부정한 자의 아들 바디매오로 부르지만,
주님은 나를 무엇이라 부르고 싶어 하실까?

마가복음 10:46~50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말씀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과 말씀 안에 드러난 원칙과 맥락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바디매오에게 어떻게 믿음이 들어왔고, 바디매오는 자신의 필요에 대해 어떻게 정직했으며,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치료와 구원이 왜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배경을 추론해보도록 하자. 믿음의 상상을 돕기 위해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잡아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해봤다.

바디매오는 어느 날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충격적이었다. 다른 랍비들은 언제나 사람보다 율법을 더 먼저 뒀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다르단 생각을 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이유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 양을 끌어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하늘 아버지의 뜻에 합한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바디매오는 자기 자신이 구덩이에 빠진 양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그분이 나를 만난다면, 그분은 나를 구덩이에 빠진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까?
또 얼마 지나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단 얘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메시아에 대해 예수님이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진짜 뜻, 그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결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얘기하셨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상한 갈대를 꺾어 버렸다. 온전한 갈대가 널린 상황에서, 상한 갈대는 필요치 않았다. 상한 갈대로는 피리를 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디매오는 자기 인생이 다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주님을 향한 열망은 차갑게 식어 더 이상 찬양이 나오지 않는 자신이 상한 갈대와 같다고 생각했다. 피리를 불고 싶어도 불 수 없는. 그런데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소중히 생각하시고, 율법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그분이 정의가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절대 끄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정의가 뭔지 잘 모르지만, 그분이 얘기한 정의와 다른 랍비들이 얘기한 정의는 다른 것 같구나. 지금까지 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고 생각을 했어. 그런데 꺾지 않으신다니. 끄지 않으신다니.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러신다니. 정의가 이길 때까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생각하시고, 안식일이라도 율법보다 사람의 구원을 더 먼저라고 생각하시는 그분의 정의는 무엇일까? 혹시 나 같은 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그가 얘기한 정의라면 그 정의가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와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빛도 비출 수 없는 아무 쓸모 없는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나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가슴이 설렜다. 사람들이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다윗의 자손. 그분이 바로 이사야가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난다고 했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가슴이 흥분되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이름을 처음 언급한 마가복음 10장의 기록 이미 그 전에 바디매오는 실패와 광야를 거치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간절함과 예수님께서 주목할 만한 믿음이 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간절함과 믿음에 예수님이 반응하여 그가 있는 곳까지 오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상상 가운데 마가복음 10장보다 이전의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기록을 읽어 보자.

마태복음 12:10~23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0.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다. (NIV 번역)
20.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nd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snuff out, till he leads justice to victory. (NIV)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 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드디어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난다. 바디매오는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었고 믿음으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늘로부터 온 믿음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바디매오의 믿음 역시 시련을 겪는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고 잠잠 하라고 제지했다. 시련을 뚫고 외칠 힘은 그 믿음 안에 이미 담겨 있다. 바디매오는 이전보다 더 크게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믿음이 예수님을 멈추게 했다. 예수님은 이때를 기다리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바디매오보다 더 그의 눈을 고쳐주고 싶으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을 테니.

하늘로부터 온 믿음이 예수님을 멈춰 세울 때, 예수님이 그 믿음에 반응하여 그를 부르실 때 어쩌면 자기 생업의 전부일 수 있는 ‘상징’을 기꺼이 버리는 모습을 말씀은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을,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물동이를, 제자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렸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의 기록에 자신이 근간으로 삼고 있던 것을 버리는 사건을 남김으로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를 보여준다.

마가복음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요한복음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마태복음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는 굳이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로 기록했다. 성경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건만, 성령님은 마가의 마음에 영감을 부으셔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남긴 것이다. 말씀 안에 이름과 지명과 고유 명사가 지닌 여러 영적 의미와 상징을 생각한다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디매오. ‘바’는 아들을 뜻한다. 즉,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 ‘디매오’는 아람어로 ‘타메’이며 그 뜻은 ‘불결한, 부정한 (unclean, impure)’ 이다. 바디매오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이름도 없이 그저 ‘불결하고 부정한 자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한 번도 환영받지 못했을 바디매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의 근간이었고, 그의 인생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 당시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냈다. 왕의 옷과 거지의 옷이 다르듯, 옷은 정체성의 상징이다. 바디매오같은 사람에게 겉옷은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밤의 추위와 낮의 더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소중한 재산이었다.

불결하고 부정한 자의 아들로 살아왔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자 생존의 근간이요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던 겉옷을 던지고 예수님께로 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버렸지만 대신 예수님의 의의 옷으로 덧입혀졌다. 역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BC와 AD로 나뉘듯, 바디매오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완전히 나뉜다.

성령님은 마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후의 정체성 변화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까? 바디매오의 헬라어 발음은 ‘바르티마이오스’. 디매오를 뜻하는 헬라어 발음 ‘티마이오스’는 ‘값을 평가하다, 공경하다’란 뜻의 동사 ‘티마오’에서 유래한 ‘높은 평가를 받는, 귀하게 여김을 받는 (highly prized)’ 이란 뜻이다. 디매오는 그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 발음으로는 ‘부정한, 불결한’이란 뜻이지만, 헬라어 발음으로는 ‘귀하게 여김을 받는’이란 너무나 상반된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바디매오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를 ‘불결하고 부정한 자의 아들’로 인식을 했겠지만, 주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의 눈에 ‘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의 아들’로 바꿔서 불러주길 원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을 바디매오는 더는 ‘불결하고 부정한 자의 아들’이 아닌, ‘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의 아들’로 바뀌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을 따르던 허다한 무리가 아닌 예수님을 멈춰 세운 유일한 한 사람.
주님은 그에게서 영계에 속한 기적을 물질계로 이동시키는 프로토콜의 열쇠, 믿음을 보셨다.
그에게는 드러난 치유의 결과 이면에 말씀이 제시하지 않은 시련을 겪은 믿음의 축적이 있었으리.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란 믿음.
가장 가능성이 없는 자에게조차 아버지의 사랑과 치유와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그분의 정의.
그 정의가 이길 때까지, 믿음을 붙드는 자에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역사가 일어난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바뀌는 믿음.
유일한 한 사람이었던 그는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유일한 한 가지를 구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깨닫는 날이 온다.
그 한 가지가 자신의 갈망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바로 주님의 갈망이었다는 것을.
주님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되는 순간 크로노스의 축적은 카이로스의 결과로 치환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
주님은 이들을 ‘불결하고 부정한 자의 아들’의 자리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의 아들’의 위치로 바꾸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듯,
하늘에서 이루어진
나를 향한 아버지의 시선,
아버지의 믿음,
아버지의 갈망이
이 땅 내 마음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체성의 변화는 인문학 공부와
자기계발의 결과가 아닌,
철저한 실패를 통한 자기 부인과
그 토대 위에 비친
나를 향한 아버지의 시선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 데일리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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