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바디매오] 무엇을 구할 것인가?
절박한 자의 간청에 응답하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신,
기적(miracle)의 주인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신다.
소경 바디매오의 곁을 지나셨던 것처럼.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때
나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
마가복음 10:46~50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이 멈추셨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부르라 하신다. 이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예수님 앞에 선 바디매오. 눈이 안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을 느끼기 위해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바디매오의 영은 예수님의 임재를 인지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았을까? 핀 라이트가 예수님과 그 앞에 선 한 사람에게만 향하고 모든 이들은 숨죽이며 바라본다.
침묵을 깨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모두가 바디매오의 입을 주목한다. 바디매오는 대답했다.
바디매오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 제목과 버킷리스트가 있었을까? 비록 눈이 보이지 않아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 선명히 자신의 소망들과 여러 기도 제목들을 기록해 놓았으리. 바디매오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자신과 평생 동역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 앞에 선 메시아 앞에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고상한 부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바디매오는 정직했다. 자신의 가장 절실한 필요를 구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기도 제목 중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오직 한 가지’ 기도 제목을 주님 앞으로 던졌다.
시대를 초월한 바디매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DAY 1 – 누가 예수님을 멈춰 세우는가?“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허다한 무리와 예수님을 멈춰 세웠던 한 사람의 얘기를 했다. 허다한 무리와 한 사람.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 물음에 ‘허다한 무리’와 ‘한 사람’의 원리를 똑같이 적용해 보면 어떨까?
주님을 향했던 허다한 기도 제목들과 주님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오직 한 가지 기도 제목.
오늘 내 앞에 멈춰 서신 예수님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나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 내 안의 허다한 기도 제목들과 유일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많은 기도 제목들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지만, 오직 한 가지만 구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 유일한 어떤 한 가지 기도 제목이 예수님을 멈춰 세우고 반응할 수밖에 없게 할 것인가? 그 한 가지에 내 인생의 절실함이 모두 묻어나는가?
신앙생활 초기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에 정직하다. 그러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한 사람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필요를 구하는 것을 어색하게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란 말씀을 믿고 여러 간절한 필요를 구했지만 거듭된 응답의 실패해 주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이였을 때는 내 필요에 정직했지만, 부모가 된 후 자녀의 필요보다 내 필요를 앞세우는 것이 불편한 것 같은 느낌으로 내 필요에 정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기가 배고프고 불편할 때 울음으로 자신의 필요를 간청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울음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필요를 간청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선생님이여.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구하는 것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정직할까?
사실 비교하는 게 어리석다. 둘 다 정직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답은 그 사람이 성장의 어떤 단계에 있는지에 달려 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선 단 한 순간도 살기가 어려운 것 같은 계절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오직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합니다”가 가장 정직한 간청일 수 있고, 아직 그 단계가 아닌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존과 맞물린 “보기를 원하나이다”와 같은 대답이 가장 정직한 간청일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의 필요와 욕구가 있고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이를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으로 정리를 하였다. 이 욕구 단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결핍과 부족에 의해 생기는 “하위 욕구(Deficiency needs)”와 더 성장하고 싶어서 생기는 “상위 욕구(Growth needs)”가 있다.
하위 욕구 단계에서의 필요에 대한 정직함과 상위 욕구 단계에서의 필요에 대한 정직함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정직함은 오직 나와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는 영역이다.
계절이 바뀌며 성장하듯 신앙의 계절에서 여름일 때의 필요에 대한 정직함과 겨울일 때의 필요에 대한 정직함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신앙 계절에서 “선생님이여 제 채무를 다 해결하여 주옵소서”가 가장 정직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신앙 계절에서 “선생님이여 북한의 지하 교회에서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는 주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소서”가 가장 정직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일 수 있는 거다. 어느 것이 더 나은 기도 제목이냐는 것은 사람의 어리석은 비교일 뿐, 아버지 앞에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라고 고백한 다윗과 같은 절실한 마음과 내 필요에 대한 정직함일 것이다.
바디매오는 여러 가지 기도 제목 중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오직 한 가지 일을 구하였다. 다윗 역시 오직 한 가지 일을 구하였는데 그것은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하나이다”였다.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바디매오가 서 있는 신앙 계절에서의 갈망과 다윗이 서 있는 신앙 계절에서의 갈망은 평범한 관점으로 보면 물질적인 갈망과 영적인 갈망으로 질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갈망과 그 정직함 만큼이나 바디매오의 갈망과 그 정직함 역시 주님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들의 갈망과 정직함은 주님을 사로잡았을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다.
오직 한 곳만 바라보는 비둘기 눈. 그 눈을 쏙 빼닮은 다윗. 얼굴을 마주하여 그 눈에 시선 맞추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갈망이 다윗을 사로잡았다. 주님의 그 갈망이 다윗에게 투영되자 다윗의 심령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주를 향한 갈망이 생겨났다. 그 갈망은 오직 주님의 아름다움만을 바라보고 싶다는 고백으로 이어졌다. 이와 똑같이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으신 주님의 갈망이 바디매오에게 투영되자 바디매오 심령 안에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란 갈망이 솟구쳤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시간이 지나면, 알 것이다. 나의 갈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주님의 갈망이었다는 것을. 말씀 안에서의 중요한 원칙은, 주님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될 때 그 갈망은 주님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주님의 갈망이 투영되어 그것이 나의 갈망이 될 때 그 갈망은 믿음과 소망을 낳는다.
바디매오의 “보기를 원하나이다”란 고백이 자신의 갈망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 갈망은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갈망이 투영된 결과일지 모른다. 주님에게서 시작된 그 갈망이 바디매오 자신의 갈망과 고백이 되는 순간 주님은 멈추셨고 그 간청에 응답하셨다.
허다한 무리가 주님을 따랐으나 주님을 멈추게 한 유일한 사람은 바디매오였고 주님은 그 이유를 “믿음”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허다한 무리를 향해 일대 일의 관계로 각각의 갈망을 갖고 계셨으나 주님의 그 갈망을 자신의 갈망과 믿음으로 표현한 사람은 그 무리 중 바디매오가 유일했던 것이다.
나의 갈망, 나의 믿음에만 초점을 맞출 때 크로노스의 시간은 쌓이나 카이로스의 결과는 보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나를 향한 주님의 갈망, 나를 향한 주님의 믿음이 나를 사로잡고 설득 시켜 그 갈망과 믿음이 나의 갈망과 믿음이 되는 순간 바디매오와 같은 카이로스의 역사가 일어난다.
무엇을 구할 것인가?
내가 서 있는 신앙 계절에서의 나를 향한 주님의 갈망과 필요에 눈이 떠지기를 마음 중심으로 소원해야 한다. 물질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의 비교가 아닌 주님은 나의 어떤 필요 채우기를 원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 필요에 대해 우는 아기처럼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영을 확인했다면, ‘허다한 기도 제목의 무리’로부터 예수님이 반응하셔야 할 유일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이 무엇일지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주시기를 갈망하자. 그 갈망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 절실한 ‘한 가지’에 대해 바디매오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에 나온 과부처럼,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매달린 한나처럼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의 시작은 나로부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시작임을 깨닫는 자가 복되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들 주기를 기도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나가 품은 그 눈물의 간청은
한나의 아들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준비시키려는
감춰진 아버지 하나님의 갈망이
한나를 통해 표현된 것이었다!
– 데일리하가 –
하나님의 갈망을 저에게 부어주셔서 그것이 저의 기도가 된 다는게 놀랍고 감사합니다. 지금 하고있는 기도의 제목들이 주님께로 난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그 기도가 주님을 사로잡아 이루어질 그 때를 바라봅니다. 그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되는 오늘 아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