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탄생을 예비한 동정녀 마리아
지금이야 예수님의 어머니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녀가 살아낸 삶은 참으로 예언의 말씀대로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 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가난한 동네에 사는 작은 히브리 소녀 마리아는 착한 청년 요셉과의 결혼이 유일한 즐거움이요 소망이었을 겁니다. 여느 아가씨들처럼 결혼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꿈을 송두리째 잃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천사의 방문이었습니다. 하늘의 빛나는 위엄과 영광으로 옷 입은 천사장과 가난한 나사렛의 마리아가 마주보고 있는 장면은 참으로 극단적인 대비입니다. 그녀가 느꼈을 두려움의 무게를 아는 천사의 첫 번째 말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그리고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며 왕이신 분이 그녀의 몸을 통해 아기의 형상으로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두 눈을 감고 한 아기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왕이 아기로 오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사랑을 재보려면 그 대상을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 라는 질문으로 그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늘의 통치자가 자신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빌2) 작고 작은 아기로 오시겠다고 하는 결정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랑인지 발견합니다. 그 사랑의 크기에 몸 둘 바를 모르지만, 그 사랑 앞에 마리아도 그분을 사랑하기로 결정합니다. 떨리는 무릎을 세우며 생명을 건 순종을 드립니다. 이 죽음을 건 순종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버림으로 마리아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받은 마리아는 꿈꾸던 요셉과의 결혼이 깨질 지라도, 음란한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정합니다. 예수님의 계보(마1)에 등장하는 다른 여인들-다말, 라합, 룻과 밧세바-이 그렇듯이 마리아도 검고 연약한 소녀에 불과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가서 1장 5절에서 양치기 소녀가 “나는 검으나 주님이 나를 아름답다 하신다(I’m dark but lovely)”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롬5:8)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어떠함과 전혀 상관없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랑에 마리아는 오직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다른 기쁨들을 다 버리고 그분을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녀를 통해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진입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베다니 마리아
예수님의 옆자리. 누구나 탐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얻게 될 권세와 능력을 갈망하며 제자들은 늘 다퉜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통해 청탁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베다니의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발치 아래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주님의 옆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권세를 향한 욕구가 아닌, 오직 주님 한 분을 갈망하다 보니 그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눈빛을 더 가까이서 보기 원하는 그녀의 마음이 그 자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서 우시는 눈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한 인간을 절절하게 사랑하시는 주님의 눈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이 온 어느 날, 주님께서 이제 죽을 것이라 말씀하실 때 그녀는 그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 그녀는 주님께서 영적인 죽음이 아닌 실제 죽음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가르침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서라도 사랑하시려는 것을 깨달은 마리아는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나드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재산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녀의 결혼이고 미래이자 삶이며 생명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자신의 인생도 함께 가겠다는 결정입니다. 주님께서 안 계시면 내 인생에 결혼도, 기쁨도, 소유도 필요 없으며, 나는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아가서 4장에서 “북풍아 불어라 남풍아 불어라 나의 향기를 모두 주님께 드리리라”라는 고백이 바로 베다니 마리아의 고백과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주님께만 속하였다는 고백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 기름부음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정에게 잡히시던 밤에도,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홀로 밤을 지새울 때도, 관원들 앞에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던 순간에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실 때도, 채찍에 맞으며 쓰러지실 때에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도, 마리아의 나드 향기를 맡으셨습니다. 호흡하는 모든 순간마다 마리아의 인생을 다 부어드린 사랑을 기억하셨습니다. 그 향기가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이 사랑의 고백을. 자원하여 삶을 드린 이 사랑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께서 죽어버리셨습니다. 무덤에 누워 계십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도, 병을 고쳐주실 수도, 능력을 행하실 수도, 천국을 보여주실 수도 없습니다. 무능력하신 주님, 죽어버리신 주님을 사랑하여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무덤을 향합니다. 새벽에 무덤가를 돌아다니는 것은 보통 미친 사람입니다. 무덤 앞에는 보초병이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며 희롱을 당할 수도,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 무덤으로 어두운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님의 모양은 시신입니다. 마리아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치유와 은혜, 축복과 상급을 주시기 때문에 나아가는 우리네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주님의 손에서 얻으려고 하지 않고, 주님이 죽어버리셨어도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마리아의 사랑을 죽음의 산에서 수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났습니다!”라고 노래하는 아가서 5장의 신부에게서 발견합니다. 핍박과 환난이 막아서고, 동역자들이 옷을 찢으며 수치를 주어도 주님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이런 차원의 사랑. 죽음도 멈추지 못했던 예수님의 사랑의 빛과 동등하게 해처럼 빛나는 사랑(아6:10)으로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사랑. 이 사랑 앞에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죽인 대제사장과 헤롯과 빌라도에게 찾아가지 않으시고 주님과 동등한 사랑의 불로 사랑하고 있는 이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죽음의 감옥에서 건져내시고, 승리의 왕으로 부활하사 하늘로 승천하시는 바로 그 복음의 진수를 가장 먼저 선포하도록 마리아를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맞이할 네 번째 마리아
아가서 1장 4절에서 “세상의 포도주 보다 주님의 사랑이 좋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한 마리아들의 공통된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오직 사랑을 선택하여 주님께서 아기의 형상이든지, 죽어버린 시신이든지, 어떠한 모양이시든지 간에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여 끝까지 따라, 따라, 또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이 공통점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의 마지막 완성의 문을 여는 네 번째 마리아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신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כלה(Kallah)입니다. 이 말에는 ‘완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신부는 역사를 완성하는 존재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장면인 계시록에서 바로 그 신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흠도 점도 주름도 없이 오직 사랑으로 단장한 어린 양의 신부가 성령님과 함께 서서 신랑을 부를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문이 열릴 것입니다. 이 신부는 이전의 마리아들이 그러했듯이 주님만 오직 사랑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그 사랑에 이끌려 어린 양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주님만을 갈망하며 끝까지 함께 가는 자들입니다.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주님께 사랑을 드리러 달려갑니다.
아가서 1장부터 8장은 죄로 물든 검은 가죽옷을 입은 양치기 소녀가 솔로몬의 휘장 같이 빛나는 의의 세마포를 입고 주님의 파트너가 되는 여정을 노래합니다. 신부의 여정의 마지막인 아가서 8장에서는 어떤 물로도,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인치고 있는 신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사랑의 불을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얻으려고 하면 수치를 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오직 순전한 사랑으로만 단장됩니다. 명예로도, 돈으로도, 학벌로도, 심지어 사역으로도 단장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단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멈출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단장되어 역사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문을 열게 되는 어린 양의 신부, 네 번째 마리아의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