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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7일 동안 ‘하가’ 함께 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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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입성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신 것은 하가였다. 전쟁을 승리하기 위한 전법이 아니었다. 전쟁을 앞둔 백성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전쟁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말씀 암송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가’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하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려는 축복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
주님이 선포하신다. 너희를 향한 계획을 내가 안다. 이 계획은 너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번영하게 하고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29:11, NIV 번역)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plans to prosper you and not to harm you, plans to give you hope and a future. (NIV)
이스라엘 백성은 늘 자신의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살았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방황,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되풀이하는 역사였다. 오늘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인생을 경영하려는 마음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예비하신 계획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 영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 수 있다. 바울에 따르면 생각에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두 종류가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이며 실재다. 이 생명의 영이 우리 삶 속에 흘러나와 내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할 때(고린도후서 10:5) 영 안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함께 풀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이 생명의 영이 흘러나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말씀을 소리 내어 씹고 녹여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양식을 취하는 하가다.
그래서 여호수아 1:8과 시편 1:1~3 말씀에서 ‘묵상(하가)’의 결과가 평탄(prosperous, 번영), 형통(successful, 성공)과 같은 축복임을 알려준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하나님은 묵상과 축복의 연관 관계를 이미 히브리어 원어 하가에 숨겨 놓으셨다. ‘하가(הָגָה)’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은혜를 뜻하는 ‘헤이(ה)’, 가운데 글자는 낙타를 뜻하는 ‘김멜(ג)’이다. 낙타는 그 시대, 그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부와 번영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중얼거리며 씹고 녹여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양식을 취할 때마다 하늘의 은혜(헤이 ה)가 부와 번영(김멜 ג)을 실은 낙타(김멜 ג)를 통해 땅의 은혜(헤이 ה)로 내려오는 상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가’는 하늘의 은혜를 이 땅의 은혜가 되게 하는 중요한 채널이요 수단이다. 하나님은 ‘묵상(하가)’의 결과가 바로 축복이요 은혜임을 이미 생각하고 이 ‘하가’란 글자를 직접 설계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축복의 근원이 되는 이 말씀이 사람들 속에 거하지 않음으로 인해 안타까워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8~40)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생의 근원이다. 영생은 모든 축복의 정점에 있다.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큰 깨달음을 얻어 머리와 가슴은 배부르게 했지만 영생의 근원이요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취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워 하시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으면 보내신 이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영과 생명의 양식)이 속에 충만하게 거해야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주야로 ‘하가’할 수 있다. 이 하가를 통해 하늘의 은혜와 축복이 땅의 은혜와 축복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2.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물
말씀은 물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씀 안에 깨끗하게 하는 물이 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그녀(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5:26, NIV 번역)
to make her holy, cleansing her by the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NIV)
또한 이 물은 생명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욥기 14장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잘린 나무가 등장한다.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은 나무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if it is cut down)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욥기 14:7~9)
…yet at the scent of water it will bud and put forth shoots like a plant. (NIV)
그런데 이 죽은 것 같은 나무에 ‘물 기운(the scent of water, 물 냄새)’이 닿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 새로 심은 것 같이 된다. 인생도 그렇다. 삶의 한 분야가 잘려져 가망이 없고 죽은 듯 느껴져 절망스럽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욥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물 기운’이 닿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 새로 심은 것 같다고 한다. ‘물 기운’의 ‘기운’은 히브리어 원어로 ‘레아흐’다. 향기와 냄새를 뜻하는 단어다. 물에 냄새와 향기가 있듯, 말씀에서도 냄새와 향기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중얼거리며 씹고 또 씹어 녹여낼 때 어느 순간 말씀에서 생명의 향기를 느낄 때가 있다. 바로 이 말씀의 기운(레아흐 – 향기, 냄새)이 절망스런 삶의 영역에 닿을 때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움이 돋는다. ‘기운’의 히브리어 ‘레아흐’의 어근은 생명의 근원인 ‘영(호흡, 바람, 생기)’을 뜻하는 ‘루아흐’다. 욥기 14장에 나오는 ‘물 기운’은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물’과 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는 ‘기운’의 합성어다. ‘하가’를 통해 말씀을 씹고 녹여낼 때 ‘영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그 기운이 죽은 것을 살려 낸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말씀(레마)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 말씀이 잘려진 나무처럼 죽은 영역에 접붙임 되면 살아난다. 깊은 한숨 나오는 절망 위에 ‘말씀의 기운’이 닿을 때 그곳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 새로 심은 것 같이 된다. 말씀 안에 생명의 물이 갇혀 있다. 이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바로 ‘하가’다. 말씀으로 인한 생명의 공급이 끊길 때 인생이란 나무는 바짝 말라 버린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아도 겉만 적실 뿐이다.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려면 저 깊은 곳까지 스며 들어야 한다. ‘하가’가 필요한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며 ‘하가’할 때 그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복을 받는다. 그것이 곧 시편 1편에 기록된 복 있는 사람이다.
3. 저주를 받는 사람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과 악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5~8)
저주를 받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1)사막의 떨기나무와 같고 2)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3)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는 것이다.
저주 받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이 오지만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저주다. 가까이 있는 가족이 축복이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 기회가 가까이 오지만 그 순간에는 좋은 것인 줄 모른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삶은 땅속에 감춰진 진주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우둔한 자의 눈을 여는 것은 말씀에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다. ‘하가’를 해야 하는 이유다.
이 사막의 떨기나무는 건건한 땅(a salt land)에 산다. 건건하다는 것은 소금기가 있다는 뜻이다. 짠 음식을 먹으면 목이 마르다. 이 땅은 목마른 땅이다. 이 환경에서 자란 나무는 모양만 나무일 뿐 열매도 맺지 못하고 그 어느 곳에도 사용할 수 없다. 그 척박한 환경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서있는 떨기나무는 존재감만 있을 뿐 생명력은 전혀 없다. 저주 받은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1)사람을 믿으며 2)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3)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을 사막의 떨기나무에 비유한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 가에 심어진 나무는 여러 차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사막의 떨기나무는 스스로 섰고, 물 가의 나무는 심어졌다는 것이다. 한 나무는 스스로를 의존하고, 또 한 나무는 심은 이를 의존한다. 땅과 거주지는 내가 의존할 대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땅(사막)과 저 땅(물 가)이 공존할 수 없다. 애굽과 가나안이 공존할 수 없다.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 한쪽은 사람과 자신의 힘, 경험, 자원을 의존하는 땅이고 다른 한쪽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땅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4. 복 있는 사람
저주(율법) 아래 놓인 자는 스스로 노력해야 하지만, 복(은혜) 아래 놓인 자는 생명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저절로 맺는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외부 조건이 최악일 때도 그 뿌리가 생명의 물에 닿아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나무가 갖고 있는 생명의 표현이다. 나무의 생명이 충만하게 넘쳐난 결과가 바로 열매다. 성화(聖化 )의 과정도 동일하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이 충만하게 넘쳐난 결과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영은 거듭났지만 옛 사람의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노력으로 쉽게 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자아의 영역을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물 기운으로 덮어야 한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어야 한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4)
복 있는 사람이라고 더위와 가뭄이 피해 가는가? 그렇지 않다. 더위 같은 삶의 어려움이 찾아와도 복 있는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뭄이 덮쳐도 걱정이 없다. 그러니 그 잎이 마르지 않고 청청하며 그 열매가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알려 주신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8)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저주에 놓인 사람은 좋은 일이 와도 보지 못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이 와도 두려움과 걱정이 없다. 이것이 ‘하가’하는 자의 복이다.
5. ‘하가’, 즐거움으로 하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하는 것이 축복의 비결임을 지식적으로 알지만 많은 크리스천이 살아내지 못한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신앙 서적을 읽고, 큐티를 열심히 하는 사람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입술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하가’하기가 쉽지 않다. 왜일까?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즐겨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으면 형식적이고, 율법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의 의식과 의무로 전락한다. 그러니 부자연스럽다. 즐거워하면 틀에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시편 1:1~2, 여호수아 1:8)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꿀 송이 보다 더 단 말씀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가’를 위한 시간은 모두 율법처럼 틀에 박힐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즐거움은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영적 갈망이 채워지는 것이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자신이 직접 길어 올릴 때,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삶에서 실재가 될 때 즐거움은 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주야로 중얼거리려면 말씀이 주는 즐거움이 내게 실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참 즐거움은 감춰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가치가 실재인 것에 눈뜰 때 비로소 자기 소유를 다 팔고, 자기가 누리던 모든 즐거움과 기꺼이 맞바꾼다. 감춰진 보화와 진주를 산 사람은 그 흥분과 설렘의 감정이 실재다. 말씀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참 즐거움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실재일 때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6, 18)
말씀의 즐거움을 가리는 ‘수건’이 있다면 벗어야 한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려면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의 ‘수건이 벗겨지리라’의 원어적 의미는 ‘계시가 열린다’이다. 감춰진 것 안에 있는 참된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뜨려면 수건이 벗겨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수건이 벗겨지는가? 바울은 그 비결을 이렇게 얘기한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신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마음 중심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 마음 중심이 주님께로 돌아간 순간 주님은 아신다. 그 때 수건이 벗겨진다. 율법적인 노력은 즐거워 하는 일을 이길 수 없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 한다고 알려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이 믿음이 말씀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게 한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성령님이 도와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