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 실전] Appendix – 나에게 하가란…

[
HAGAH OF THE LESSON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shaken. (ES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S

Still&Sync

WHO
누구를 볼 것인가?
---
기도

O

Outline&Observe

WHAT
무엇을 말씀하시나?
---
관찰/해석

A

Align&Author

HOW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
적용

R

Reflect&Respond

WHY
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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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다음은 ‘[실전] 7일 동안 하가 함께 해보기’를 진행한 분들의 간증 일부입니다.
언젠가 새로 산 스마트폰을 사흘만에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마침 누군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다 화장실에 들른 참이었다. 잠깐 세면대 위에 올려둔 채로 화장실을 나섰다가 바로 돌아갔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약속시간에도 늦었고 인터뷰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큰 맘 먹고 산 스마트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보험에 들어 리퍼 제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한달 동안 나는 내내 잃어버린 핸드폰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새 기계 특유의 향기와 광택, 손끝에서 느껴지던 유리의 감촉, 심플하면서도 화려하게 작동하는 처음 보는 다양한 앱들, 음악을 듣고 지도를 보고 문자를 보내고, 다시 누군가에게 새 폰의 장점을 줄줄이 웅변하던 그 순간의 짜릿한 기억들… 그런데 처음은 그보다 더 설레었지만, 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존재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교회를 다닌 지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고, 신앙생활이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다양한 설교와 신앙서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충만함이 무언지도 종종 경험했다. 때로는 치유를 위한 기도를 받기도 하고 방언으로 하는 특별한 경험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하지만 과연 한 달 이상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며, 때로는 나를 떠나간 듯 여겨지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스마트폰처럼 갈망한 적이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고작 100만 원이 채 안되는 기계와 하나님을 비교하다니, 이렇게 불경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하루만 스마트폰을 잊은 채 두고 나와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하루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을, 불안을, 공허함을. 하지만 하나님 없이는 1년을 살아도 그런 조바심과 허전함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 실연이나 실직, 사업상의 어려움과 건강상의 심각한 위협,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들러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렇고 혼자 읊조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과연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 분은 내 일상의 삶, 혹은 인생 전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 주,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과 묵상이 무언지를 고민했다. 데일리하가는 그것을 ‘하가’라고 불렀다. 말씀을 읽고 외우고 읊조리고 생각하고 적용하고… 오랜 신앙생활의 경험으로 나는 그것들이 대략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동행과 임재, 살아 움직이는 말씀,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신앙의 위력… 하지만 마치 박제처럼 굳은 내 마음은 처음부터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미 다 해본 것들이잖아. 성경말씀은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번이라도 네 삶을 바꾼 적이 있니? 그렇게 마음 설레던 설교와 집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도루묵이었잖아.’ 제자훈련을 하고 전도폭발훈련을 하고 세상의 콘서트에 필적할만한 워십 찬양의 뜨거운 현장 속에서 금방이라도, 당장 내일이라도 나와 이 세상이 바뀔 것 같이 여겨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고 갈등하는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그 모든 감정들이 신기루처럼 휘발되는 경험 또한 여러번 반복해왔다. 성경공부와 암송, 필사와 큐티를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하가’가 과연 이런 경험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적어도 한 주가 지나기 전까지는 기대와 회의가 조삼모사처럼 반복되었다.
아침에 눈을 뜬다. 자주 알람소리보다 살짝 먼저 일어나 알람을 끄곤 했었다. 뭔가 하루를 재촉받는듯한 느낌이 괜히 싫어서였다. 그리고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 양치부터 하곤 했었다. 그 생각들이란 대부분 일에 대한 압박, 관계로 인한 부담, 한번에 해결책을 찾기 힘들어보이는 염려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하가’를 시작한 이후론 조금 달라졌다. 그것들이 밀려들기 전에 미리 말씀의 장벽을 치기 때문이다. 하가를 위해 암송한 말씀은 시편 16편 8절이었다. 한 구절로 이뤄진 다윗의 이 고백은 짧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언뜻 보면 시편의 다른 말씀들과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 평범한 말씀이다. 그래도 한 주 내내 읊조리다 보니 외웠다기보다는 입에 붙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자기 전에 양치를 하거나 샤워를 하는 것처럼.
한동안은 이 말씀의 뒤에 숨은 뜻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외워버렸다.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리를 채우거나 압도하기 전에 미리 선을 긋는 일종의 폴리스라인 역할과 비슷했다. 그리고 조금씩 다양한 성경 버전과 배경 설명을 통해 그 숨은 뜻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대단치는 않지만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가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를 살다보면 적잖게 다양한 환경과 감정의 위기를 만나곤 한다.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말씀을 외우고 쓰고 읊조리고 생각하고 묵상했다. 그때마다 마음에 알 수 없는 평안이 조금씩 찾아들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려고 애를 썼다. ‘항상’ 그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 낭비가 아니라 그토록 하나님이 주고 싶어하시던 유익이며 복이고, 기업이며 유산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본능적인 것이다. 하지만 또한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문제들은 ‘나를 향한 나의 사랑’, 즉 자기중심적인 본능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남들보다 더 앞서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 불편한 관계들, 나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과 회사와 세상을 향한 분노…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음을 이제는 고백해야겠다. 주일의 설교와 의례적인 기도를 상처에 급하게 붙이는 밴드처럼 가볍게 생각했음도. 나의 문제를 하나님이 나보다도 더 걱정해주고 계심을 미처 알지 못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나의 삶 전체를 계획하고 움직이고 계심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더 매달라고 붙들었어야 했다. 그저 자기계발서와 경영서에 나오는 지침처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위로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그 이상의 변화도 없었던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내 삶은 애초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나은 나를 발견하고 계발하기 위한 ‘나다운’ 삶이 아니었다. 내 삶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삶은 결국은 모두 허망한 것으로 흐른다는 것을 조금 더 절실하게 알아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가는 느리게 느리게 방향을 전환하는 과정에 있는 큰 범선을 떠올리게 했다. 너무 급하게 방향을 바꾸면 배가 위험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키를 돌리는 조타수의 인내와 끈기가 필요했다. 당장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손을 놓으면 배는 늘 가던 방향으로 곧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쓰고 외우고 읊조리고 묵상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책장을 덮고 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큐티와 하가는 그점에서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하가의 삶은 이처럼 나를 향해 자꾸만 돌아가는 나침반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과정이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하실 뿐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계획과 이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신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랜 신앙 생활 동안 숱하게 들어오던 약속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혼을 넘어 나의 영에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시간과 깨달음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리된 시간과 공간이었다. 온갖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나의 생각들, 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세상의 유혹들과 나를 떼어놓아야 했다. 생각은 절대 빈공간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항창 채워져 있는 곳이 바로 생각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적인 생각들이 가득한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설 공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자 비로소 조금씩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들었다. 불일듯 이는 혼의 욕심을 달래고 내 영이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닿기를 기도하고 간구했다. 일주일 동안 아침마다, 하루 중 틈틈히,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간과 공간에 시편 16편의 말씀을 가져다놓았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셨다. 그 하나님이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셨다.
하가를 진행하던 한 주간의 금요일 밤, 대개의 ‘불금’은 아껴두고 미뤄두었던 미드나 영화를 보곤 했다. 새벽 늦게까지 한 주 내내 아쉬웠던 뭔가를 채우기 위해 분주했지만 한 번도 마음 속 깊은 평안까지 다다른 적은 없었다. 일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나, 몸은 조금 더 편했을지 모르나 내 마음은 그 시간에도 여전히 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다. 한 주 내내 곱씹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러한 시간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 깊은 속에 있는 중심, 즉 나의 영을 비로소 쉬게 만든다.
오래전 읽었던 다양한 신앙서적들 속의 저자들이 바로 지금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묵상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염려와 불안은 다름 아닌 불신앙이고 불순종이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 전부터 계획하고 지으신 ‘진짜’ 나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내가 일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일의 결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를 내려놓은 하나님 중심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얻은 자존감은 상황의 어떠함과 상관없는 깊은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으로 인도한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다. 하나님이 그런 나를 가장 기뻐하시며 그러한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신다는 것, 그제서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무실에서 8개월 가까이 키워오던 화분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윤기가 흐르던 녹색 빛의 잎이 어느 순간 속에서부터 노랗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검색을 통해 이 화분이 원래는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이 아님을 알아냈다. 화분을 사무실 실외기가 있는 바깥 그늘에 옮겨놓고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화분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냇가에 옮겨 심지 않으면 우리는 곧 (영적인 의미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 당장은 생동감 있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뿌리 없는, 물이 말라버린 사막의 식물과도 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은 지금의 모습과 상관없이 살아있는 자다. 그 안의 영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하가는 우리의 주변을 물댄 동산으로 만들어가는 작업과 닮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처럼 내리면 그 물을 담아놓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물이 매일의 순간순간마다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바로 다다를 수 있도록 나의 주위를 둘러싼 넓은 동산. 잎이 푸르러지고 꽃이 필 때까지 우리는 그 곳에서 어떤 열매가 맺힐지 미리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질 것이란 믿음이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그 충만한 물기운의 은혜를 누리는 것 뿐이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욥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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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7일 동안 하가 함께 해보기’를 진행하면서 당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세요. 내 삶에 영향을 미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읽는 누군가에게 내게 역사하셨던 그 영이 흐를 것임을 믿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한 후 ‘댓글 달기‘를 통해 하가를 통해 누린 당신의 은혜를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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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사례 모음
지금까지 소개했던 하가 사례들을 한 곳에 모아 봤습니다. 다시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 아이콘을 클릭하여 펼쳐 보세요!
하가 되새김질 사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전 중입니다. 길이 꽉 막혀 있습니다.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합니다. 멈춤 신호가 켜지기 전에 교차로를 건너야겠단 생각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바로 내 앞에서 멈춤 신호가 켜졌습니다. 늦었다는 불안함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불편함이란 일차적 감정이 먼저 올라온 상태에서 신호등이 빨리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호등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을 보게 되면 반드시 무엇을 한다’처럼 ‘어떤 상황에 부닥치면 반드시 하가를 한다’와 같은 하가를 위한 트리거(trigger)를 설계해 보란 글을 읽고 ‘신호등을 볼 때마다 하가를 해야지’ 결심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주간에 ‘하가’하던 말씀은 시편 23편이었습니다. 불편한 마음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중얼거려 봅니다. 시편 23편 1절 전체도 아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분만 끄집어 올려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며 되새김질했습니다. 이미 하가하던 말씀을 끄집어 올려야겠다 생각했을 때부터 불편한 감정이 말씀 앞에 머리를 숙이고 더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계속 운전을 하며 가는 동안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운전하고 있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 그렇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신데… 다른 사람의 목자가 아닌 바로 <나>의 목자이신데…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내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나>의 목자이신데…’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길이 막혀 비록 약속에 늦는다 할지라도 바로 <나>의 목자이신 주님이 그 어떤 부족함 없이 나를 이끄시리란 믿음이 들어오자 한순간 평안함이 밀려 옵니다. 길은 여전히 꽉 막혀있지만, 그 상황과 상관없는 평안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여 평안이란 우유를 얻은 예입니다.
언제든(when) 어디서나(where) 하가 사례

1.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하루가 창조되어 눈앞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이 하루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께 아침마다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립시다. 모든 과거의 부정적인 것은 다 떨쳐 버리십시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말씀을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지요? 내 숨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말씀의 숨이 세상을 향해 던져지게 하는 것은 어떨지요? 이번 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편 16:8 말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해 보십시오. 이 훈련을 며칠 하고 나면 말씀을 중얼거리며 깨는 자신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잠에서 깨는 것,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2. 잠자기 전에

오늘 하루가 행복했습니까? 아니면 힘들었나요? 좋은 것들만 추려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수치와 낙망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잠자기 전 모든 것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날의 수고와 근심과 염려는 물론 그날의 은혜와 기쁨과 영광까지도요. 잠자기 전 나만의 ‘리츄얼(ritual, 儀式)’을 계발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루를 마감하며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염려가 나를 붙들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리셋(reset)시킨다고 고백해 봅시다. 그리고 새로운 날에 대한 소망을 품어 봅니다. 틀림없이 그날 그날 족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말씀을 ‘하가’하며 잠들어 보십시오. 복잡한 생각과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중얼거리며 잠드는 겁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잠들고 꿈에서도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시편 내용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씀을 읊조리며 잠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보십시오. 잠을 자는 동안에 상한 마음과 몸까지 치유시키실 주님을 기대해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3. 걸어 다닐 때

‘하가’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걸어 다닐 때입니다. 성경 암송대회에 나가려고 말씀을 암기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성경책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씀 자체를 중얼거리며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출퇴근할 때,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 식사하러 가면서, 산책하면서 암기한 말씀을 중얼거리고, 읊조리며, ‘하가’해 보십시오. 발걸음 리듬에 맞춰 ‘하가’할 때 심장 박동과 함께 혈액을 타고 말씀이 흐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말씀에서 갓 짠 보혈이 내 천연적 피를 덮을 것입니다. 걸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자가 아님을 의식하십시오. 말씀이신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걸으면서 ‘하가’를 한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입니다. 업무 중, 집안일 중, 공부 중일 때 일부러라도 잠시 짬을 내 걷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꼭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목적을 정해 두고 바쁘게 걷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말씀이신 주님과 교제하고 싶은 갈망으로 걸어보십시오. 걸으면서 말씀을 입에 올립니다. ‘저는 정말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고 싶어요. 주님을 더 알고 싶어요.’란 마음으로 입에 올린 말씀을 중얼거립니다. 말씀을 중얼거릴 때 영적인 에너지가 흘러나옵니다. 걸으면서 ‘하가’를 하는 것은 몸과 영혼 모두에 건강이 될 것입니다.

4. 미팅 직전에

하루에도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과의 미팅일 수도, 믿지 않는 사람과의 미팅일 수도 있고, 공식적인 미팅일 수도, 편한 사람들과의 미팅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모든 순간순간에 부모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당연히 내가 만나는 모든 만남에도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모든 만남 전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주님… 제가 주님을 이 만남에 모십니다…’라고 하가하며 고백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하가하고 기도하는데 10초도 안 걸립니다. 영의 영역은 내가 믿는 만큼 실재입니다. 아주 짧은 고백이지만 주님은 들으시고 그 만남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5. 일하는 중간마다

일에 몰입해 있으면 성령님이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원고를 쓰다가도, 문서 작업을 하다가도, 디자인에 몰두하다가도, 설거지하다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도 중간중간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짧은 순간은 사실 몇 초도 되지 않습니다. 내 물리적인 눈으로는 여전히 컴퓨터를 보고 있고, 그릇을 보고 있고, 아이들을 보고 있지만, 마음의 눈은 언제든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훈련만 된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이 자리에 모십니다’란 고백은 아주 순간적이지만 영원(永遠)과 맞닿게 합니다. 하가를 통해 일상의 멈춤(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주님이 내 시간의 보좌 위에 ‘주(主, Lord)’로 좌정하실 것입니다. 주를 향한 마음의 갈망을 품고 이 멈춤의 시간을 훈련한다면 일하는 중간중간 하가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6. 식사하면서

식사 전후는 ‘하가’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울 때 영의 갈망도 함께 떠올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먹은 것이 곧 육신의 ‘나’입니다(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는지가 내 육신의 성분을 결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후 하나님은 애굽의 음식에 길든 그들의 식성을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 내내 ‘말씀’을 상징하는 ‘만나’를 먹게 하셨습니다. 육은 땅의 음식이 필요하지만, 영은 하늘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말씀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식사 시간마다 ‘하가’하는 말씀이 나를 둘러싼 모든 염려와 스트레스를 삼켜 버리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식사 전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하시는지요? 적어도 식사 시간 때만큼은 ‘하가’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하가’하는 말씀을 통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수련회 가면 식사 전 성경 암송을 해야 밥을 먹었습니다. 이제는 시켜서가 아니라 주님을 너무 사랑하여 자원하는 기쁨으로 식사 전 하가를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7. 어려운 상황 중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13)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문제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볼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자신을 삼킬 것 같은 파도를 바라볼 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물 위에 계십니다. 나를 삼킬 것 같은 문제 위에 계십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에 빠지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그 문제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이신 주님을 하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가하며 영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불안과 염려와 걱정을 제압하시며 그 위를 걷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 하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주님이 지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내가 밟고 있는 땅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하늘 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믿음을 구하십시오. 나의 믿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믿음이 들어올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언제 들어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로마서 10:17). 말씀을 통해 그 문제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들어 오도록 소리로 중얼거리며 하가하십시오. 그 하가의 소리를 타고 한순간 문제를 푸는 믿음의 열쇠가 들어올 것입니다.

8. 운전 중에

운전을 정기적으로 한다면, 자동차 안 만큼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큰 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해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입니다. 자동차는 내 태도에 따라 가장 최상의 예배 장소로 만들 수 있는 곳입니다. 자동차 안에서 하가하는 말씀을 큰 소리로 선포해보십시오. 그 소리에 마음 중심을 실어 보십시오. 그 소리가 자동차의 공기를 바꿀 것입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가 소리를 타고 그 자리에 풀릴 것입니다.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만큼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말씀 자체를 소리 내 풀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기도하기보다 암송하고 있는 여러 말씀을 계속 선포하십시오. 선포하는 중에 감동 주시는 것이 있으면 그 감동을 고백과 기도로 바꿔 보십시오. 이런 흐름을 타고 목적지 도착 전까지 하가로 계속 기도하다 보면 자동차가 곧 지성소임을 경험합니다. 자동차는 하나님과 나만의 추억을 쌓는 가장 귀한 예배 장소입니다. 신호 대기 중에 우두커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멈춤 신호가 켜지면 ‘하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항상 모십니다’ 고백해 보세요. 자동차 핸들은 내가 붙들고 있지만 내 인생의 핸들은 주님이 붙들고 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9. 가장 사소한 일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에 편재(遍在, omnipresence)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누추한 우리 안에 거하기로 하셨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을 의미합니다.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의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와 함께 하십니다. 임신한 여인은 모든 상황에서 조심합니다. 임신 초기 태동이 없어도 자신이 임신한 것을 의식합니다. 자신과 언제나 함께 하는 태중의 생명을 늘 인식하기 때문에 먹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상황에서 조심합니다. 거듭난 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조에, zoe)이 있습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생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인식하는 것이 곧 생명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영에 통제를 받는 것을 ‘영적(프뉴마티코스, 靈的)’이라고 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모든 순간 태중의 생명에 통제를 받듯,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에 통제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이 생명의 영에 통제를 받는 순간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드러나십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사소한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신문 보는 일? 손톱 깎는 일? 드라마를 보는 일? 설거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일? 과연 이런 일에도 주님이 함께 하실까 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동안 인식을 못 했을 뿐입니다. 인식하는 만큼 나타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화초에 물을 주며 왜 하가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요? 손톱을 깎으며 왜 하가할 생각을 못 해봤는지요?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에 태중의 생명을 인식한 여인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하며 하가하는 훈련을 의도적으로 해보십시오. 이런 훈련을 통해 가장 사소한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0.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영과 영의 연결은 한순간입니다.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준비하고 노력해서 절차에 따라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주를 향한 마음속 갈망이 주님을 터치할 때 주님은 나의 마음을 터치하십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처럼 마음 중심으로 ‘주님~’이라고 부를 때 영과 영의 연결은 0.5초도 안 걸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란 마음 중심의 고백에 반응하기 위해 언제나 대기 중이십니다. 말씀을 입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주야로 ‘하가’하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귀찮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닐 겁니다. 나를 도와주고 싶으셔서입니다. 내가 ‘하가’할 때 영이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 속에서 ‘하가’하길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심령 가운데 부어지길 기도합시다. 말씀 자체가 내 모든 시간과 삶 전부를 주장할 때 하나님은 나의 삶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어떤 방법으로든(how) 하가 사례
말씀을 끊임없이 내 입술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그림자처럼 붙어 있게(shadowing) 할 만한 자신만의 방법들을 꾸준히 찾아보십시오. 다음은 몇 가지 예입니다.

1. 부착물

포스트잇이나 종이에 ‘하가’하려는 말씀을 써보십시오. 컴퓨터, 냉장고, 문 앞, 화장실 등 보이는 곳곳에 붙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눈에 보일 때마다 하가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부착물에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애착이 가기도 합니다. 부착물을 만드는 시간도 하가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만드는 과정 자체가 귀한 시간일 수 있는 겁니다.

2. 스마트폰 배경화면

‘하가’하려는 말씀을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스마트폰만큼 접근성이 좋은 것도 없을 겁니다. 하가 말씀을 배경 화면으로 하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포토샵과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해도 좋고, 종이에 쓴 것을 사진 찍어 배경화면으로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3. 말씀 카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말씀을 암송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역시 말씀 카드였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해 가고 있지만, 손으로 쓴 말씀 카드는 또 다른 감성을 제공합니다. 말씀 카드를 만드는 동안 외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가를 하며 떠오르는 소중한 사람에게 말씀 카드를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4. 말씀을 음성으로 듣기

성경 말씀을 들을 방법이 많아졌습니다. 하가를 진행하는 구절들만 따로 음성 파일로 만들어 보십시오. 출퇴근이나 이동 중에 반복해서 들으면 효과적으로 암송할 수 있습니다. 음성 파일을 구하기 어렵다면? 자신이 직접 녹음해서 듣고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내 안에 성우 본능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5. 알람 활용

의식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대로 삽니다. 하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바쁘게 살다 보면 생각조차 못 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도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보면 어떨까요? 나만의 하가 시간을 정하여 알람을 맞춰 보십시오. 알람과 함께 나만의 하가 시간을 갖고 짧게 기도한다면 시간의 주권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6. 함께 하기

하가를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같은 구절로 하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가를 진행하며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말씀의 힘은 배가 됩니다. 또한, 서로를 통해 하가를 계속하게 하는 큰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특별히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식사 시간 등의 특정 시간을 정하여 함께 암송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7. 자신만의 트리거(trigger) 계발

개에게 먹이를 주기 직전 종을 치면 나중에 종만 쳐도 침을 흘립니다. 이를 ‘조건반사’라고 하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가’를 하려 할 때 이 조건반사 원리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특정 조건일 때 반드시 ‘하가’를 하는 겁니다.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특정 조건을 트리거(trigger)라 부릅니다. ‘하가’에 대한 자신만의 트리거(trigger)를 설계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이빨을 닦을 때’, ‘샤워를 할 때’, ‘버스를 탈 때’, ‘일하기 싫을 때’ 등의 조건을 설정하고 그런 조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하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죠. 이런 특정 조건에서 무조건 하가를 하는 훈련을 일정 기간 반복하다 보면 그런 조건일 때 ‘하가’를 하지 않으면 스스로 어색함을 느낍니다. 어느새 습관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습관을 바꾸기 위한 훈련 방법으로 트리거 설계를 많이 이용합니다. 자신만의 트리거를 설계해보십시오.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은 트리거 설계 샘플입니다.

8. 하가 트랙커(tracker) 활용

자신만의 트리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습관으로 정착시키려는 방법으로 ‘트랙커(tracker)’를 많이 이용합니다. 트랙커는 설계한 트리거를 일자별로 잘 수행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이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하면 무조건 하가를 한다’고 트리거를 설계했으면 일자별로 잘한 날에 스탬프를 찍거나 예쁜 스티커를 붙여 줍니다. 3일 정도 열심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빈칸을 채우다 보면 약간의 고비를 만나도 채워진 칸을 보며 일주일을 끝까지 도전해봐야겠단 도전 의식을 갖게 됩니다. 빈칸을 다 채운 후에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음은 하가 트랙커 샘플입니다.
하가 트랙커 샘플

일상에서의 하가 실천 사례(1)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진다. 여러 복잡한 상황 속에 외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다.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문득 하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온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겠단 약속을 붙들고 주님께 초점을 맞춘다. 여전히 걷고 있지만, 주님이 오른편에 함께 계심을 인식한다. ‘주님…’이라고 불렀을 뿐인데 복잡한 상황으로 심령이 가난했는지 마음 중심을 주님께 맞추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하가하고 있던 시편 16:8 말씀을 떠올린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빠르단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건 암송이 아니지, 하가지…’란 생각과 함께 영의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기를, 주님 마음 알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말씀에 마음을 싣는다.

‘내가… 여호와를… 내가… 여호와를… 내가 여호와를… 내가… 내가…’

이렇게 말씀을 읊조리는데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그렇지… 이건 나의 고백이지…’란 생각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이 따라온다.

‘사랑하는 주님. 다윗이 주님을 자신 앞에 모셨듯… 바로 내가… 바로 내가… 주님을 지금 이 자리에 모십니다…’

영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내가…’란 하나의 단어가 마음을 터치한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주님… 바로 내가… 바로 내가… 항상, 영원토록,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든지… 주님을 제 앞에 모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기록된 글자였다. 하지만 말씀을 하가하는 중에, 중얼거리는 중에, 읊조리는 중에 성령님이 ‘내가’란 하나의 단어를 통해 마음을 터치하신 순간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이 붐비는 길을 걷는 동안에도 뜨거운 임재 경험을 한다.

중요한 업무 보고가 있어 전철을 타고 이동 중이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 온통 업무 보고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마음이 불안해서인가? 업무 보고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해달란 기도가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음이 급하다고 결과 중심의 기도를 하고 있구나. 나의 뜻 이전에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게 먼저인데.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업무 보고가 무슨 소용이람.’ 고조되었던 마음이 이전과 달리 차분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평소 하가하던 말씀을 입술 위로 끄집어 올린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말씀을 하가하는데 사람이 꾸며낸 천 마디 말보다 하나님의 영이 실린 한마디 말이 더 위력적이란 믿음이 갑자기 들어왔다. 이런 믿음이 들어오자 마음 중심이 실린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모시지 않고 업무 보고 준비를 했네요. 주님… 마음 중심으로 이 시간 주님을 업무 보고 자리에 모십니다. 제가 사람을 의식해 만들어 낸 지혜의 천 마디보다 주님이 함께 하신 한마디 미련한 말이 제겐 더 소중함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업무 보고 가운데 제 오른쪽에 계시사 저로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마음이 실려서였을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 안에서도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만나기만 하면 어려운 사람이 있다.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피하기도 쉽지 않다. 그 날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가시처럼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상황을 만나면 자주 넘어진다. 그럴 때면 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동일하게 아프게 해야 속이 풀리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틀림없이 감정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하가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의식적으로 하가를 훈련하던 때였기에 가능했으리라.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감정의 쓴 물이 올라왔지만, 그 쓴 물을 말씀으로 눌러 내리는 상상을 했다.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고 강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마음이 실리지 않았다. 상기된 감정을 다스리기엔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계속 말씀을 중얼거리던 중 갑자기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가 마음을 툭 건드린다.

‘이미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는데 왜 이 혈과 육의 싸움에 휘말려 감정이 흔들려야 하지?’

이런 생각과 함께 믿음이 들어 왔다. 믿음이 나의 감정을 일으켜 세우자 이런 기도가 나왔다.

‘이 어둠의 영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상에서 승리하셨고 너는 패하였다. 그 예수님이 지금 내 오른쪽에 계시다. 그러므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기하다. 단순히 말씀을 하가하고 그 순간 들어온 믿음으로 기도했을 뿐인데 무너지려던 감정이 온데간데없고 평안함이 임하는 것을 경험한다.

퇴근해서 오니 사랑하는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

‘사랑하는 주님. 내가 이 시간 주님을 이 아이 앞에 모십니다. 아직 신앙고백을 못하는 이 아이를 대신하여 마음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평생 이 아이 앞에 주님 모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아이 오른쪽에 계시사 모든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만큼 마음 중심이 실린다. 마음이 뜨겁다. 주의 성령이 잡은 손을 타고 아이 가운데 임하는 것을 믿음으로 상상한다.

결과를 내야 하는 디자인 작업을 진행 중이다. 3시간을 쉬지 않고 모니터를 보며 디자인 작업에 몰입했다. 작업하는 동안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니터 옆 포스트잇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하가하기 위해 붙여놨던 시편 16:8 말씀이다. 너무 업무에만 몰입했던 것 같아 잠시 눈을 감고 하가를 한다. 소리 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하가할 힘이 없을 정도로 눈이 피곤하여 눈을 감고 이 구절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주님은 모시지 않고 모니터만 모신 자신이 비쳤다. 한 템포 쉬어 가려 중얼거렸던 하가 말씀인데 말씀이 나 자신을 조명한 것이다. 하가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디자인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과의 동행이란 깨달음이 들어 왔다.

‘제 오른쪽에 계신 주님.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이 디자인 작업물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작업물에 당신의 생기가 흘러들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지금 이 작업 가운데 모십니다.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이 기도와 함께 자신의 손을 모니터 쪽으로 뻗으며 성령님이 믿음의 고백을 타고 흐르기를 소망한다.

사람과 편하게 대화 중이다. 눈을 보며 대화에 집중한다. 0.1초도 안 될 아주 짧은 순간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구절이 떠오른다. 전체 구절도 아니다. 그 짧은 구절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미 그 말씀을 통해 많은 누림을 경험했었기에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그 느낌은 대화의 밀도를 끌어 올린다. 눈으로는 상대방 눈을, 귀로는 상대방 말을 경청하지만 동시에 마음으로는 ‘주님을 이 대화 가운데 모십니다…’고 심중에 고백한다. 하가를 하는 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멀티 프로세스다. 평범한 대화마저도 영적인 시간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경험한다.
일상에서의 하가 실천 사례(2)
1.
월요일 아침, 눈을 뜬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 소리,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새소리. 그리고 연이어 들어오는 해야 할 일들, 미팅, 만나야 할 사람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분주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기 전에 조그맣게 마음속으로 읊조린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렇다. 내 생각은 내가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선택한 것으로 순식간에 채워지게 마련이다. 이 아침의 분주한 생각과 하나님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로 채울 수 있을 뿐이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을 생각하는(모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작은 선택이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월요일의 아침을 바꾼다. 그 결과는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평안이다.

2.
출근길, 좁은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린다. 맞은편 중년의 신사는 쉴 새 없이 신문을 접고 펼치느라 소란스럽다. 뒷사람의 백팩은 쉴 새 없이 등을 찌른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모두 신경이 곤두선 상태의 한 마디가 어떻게 불똥처럼 튈지 모르는 터라 나 자신이 예민해서 그런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눈을 감는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문득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면 뭐라 하실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실 것이다. 피곤하고 힘든 출근길에 선 지하철 안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이다. ‘아버지, 이 안의 모든 지친 이들에게 여유와 기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짜증이 잦아든다. 내가 맨 백팩을 먼저 내려놓고 옆 사람을 위해 공간을 조금 더 내어준다. 그 사람이 고맙다는 듯 무언의 감사 눈빛을 내게 보낸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지만, 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 앞의 하나님이 웃으신다.

3.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 뭔가를 좀 읽어보려는데 카톡이 울린다. 귀찮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어 열어보니 아들 일로 잔뜩 속이 상한 친구의 카톡이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매번 교무실에 불려 다닌단다. 때린 적이 없는데도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아들 친구와 그 학부모 때문에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저 들어준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지막이 시편의 말씀을 읊조린다. 친구에게 말한다. 아들에게 이렇게 전해달라고. 삼촌은 언제까지나 네 편이라고.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친구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카톡을 보낸다. 카톡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친구의 분노도 잦아들었다.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평안이 인다. 친구도, 그 아들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4.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다. 잠시 모니터에서 손을 떼고 시편 말씀을 다이어리에 적어본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하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셨을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마음에 들어온다. 마음이 편해지니 오히려 자유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일에 더욱더 몰입되는 나를 본다.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더욱 가깝게 느낀다. 만약 일의 결과가 좋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5.
주말 아침,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의 공부하는 모습을 본다. 괜히 마음에 걸려 물어보니 시험이 다음 주라고 한다.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책을 읽어주며 공부를 시작한다. 축 늘어져 있던 아이의 몸에 생기가 돈다. 전화 예절에 관한 글인데 남자애가 나오면 아빠가, 여자애가 나오면 딸이 읽는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시편 16편의 말씀과 지금의 내 모습이 매우 비슷하다는데 생각이 이른다. 딸은 아빠 품에서 자칫 지겨울 뻔했던 공부를 신나게 마쳤다. 아빠는 이 시간이 혼자 책을 읽는 그 시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즐거웠음을 깨닫는다. 아마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6.
작은어머니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퇴근해서 와이프의 얘기를 들어보니 사촌이 돈 많이 번다는 얘기에 어머니가 발끈하신 듯하다. 와이프는 내게 스트레스를 푼다.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기분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문득 결혼식에 선물 받은 벤츠를 몰고 나타났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세상의 비교로 흔들리지 말라고. 비교의 대상은 연봉도 좋은 차도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의 여부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유쾌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어머니에게는 몸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니냐 말씀드리며 문안 전화를 드린다. 비교로 인한 우울함이 그날 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7.
오래간만에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 편에선 처음 만났던 때의 열정이 사라진 그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어느새 틈틈이 비치는 흰머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누는 이야기도 꿈이나 희망에 관한 이야기보다 그저 현상 유지나 하자는 쪽으로 모아진다. 만약 하나님이 자리에 함께 하셨으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에 여전히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는가가 아닐까.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밴드를 개설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주고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오른편에 계시는 한 아직 ‘흔들릴’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Still & Sync 단계에서의 말씀 필사 사례
Still & Sync는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시간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겠다는 마음을 다잡는 시간입니다. 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케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가를 위한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문을 쓰거나 말씀을 필사하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고 주님과 연결하려는 마음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그 사례입니다.

Still&Sync 사례 1
Still&Sync 사례 2
Outline & Observe 단계의 재료준비 예
Still & Sync 단계 때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를 정하고 미리 준비한 배경 찬양을 재생시키는 것을 언급했는데요. Outline & Observe 단계를 위해서는 만년필, 연필, 형광펜, 색연필, 보조 노트, 포스트잇 등 메모하고 꾸미는 도구 등을 미리 준비하면 좋습니다. 하가를 진행할 말씀을 선택했다면, 그 말씀을 암기할 정도로 여러 번 읽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포함한 전체 본문을 살펴봅니다. 그 구절이 어떤 맥락 가운데 나왔는지 파악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23:1 말씀을 하가하기로 했다면 시편 23편 전체를 읽으면서 1절 말씀을 파악하는 겁니다. 하가할 구절을 중심으로 그 앞뒤 구절을 차례대로 동심원 그리듯 읽어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가로 선택한 구절은 보통 한 절입니다. 하지만 그 한 절에 그 구절을 포함한 전체 맥락을 압축하여 하가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즉 하가는 23:1 한 구절을 하지만, 시편 23편 전체 내용을 살펴보며 얻은 감동과 시편 23편의 전체 느낌을 1절 한 구절을 하가할 때마다 함께 오버랩시키는 겁니다. 마치 말씀 한 절로 그 전체 맥락을 함께 붙들려는 마음가짐입니다. 말씀 한 절에 전체 맥락을 담는 훈련은 하가를 균형 있게 또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가할 구절을 포함한 전체 맥락을 파악할 때 여러 번역본의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성경 번역본을 봄으로써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본문과 관련한 배경적 지식 등도 이 단계에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가할 구절 → 그 구절을 포함한 본문 → 그 본문의 여러 번역본 성경 → 그 본문과 관련 있을 만한 배경적 지식 등의 순서로 자료 조사를 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조사한 내용은 향후 성경 본문 없이 길거리를 다니며 하가할 때 성령님이 요리하기 좋은 재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다음은 시편 16:8 말씀을 하가하면서 그 연관 본문인 사도행전 2:25~28 말씀을 함께 조망하고, 관찰하고, 하가 재료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진 사례입니다.

Outline&Observe 사례 1
Outline&Observe 사례 2
Outline&Observe 사례 3
Outline&Observe 사례 4
상황과 맞지 않는 하가 구절을 삶 속에 적용한 구체적인 예
무릎 연골을 다쳐 걷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있던 한 사람의 간증입니다. 그 시기 이 사람이 하가 하던 말씀은 이사야 54장 1절입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사야 54:1)

점심을 먹으러 가던 도중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가까운 정형외과 검사 결과 MRI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연골 쪽 문제고 심하면 수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똑바로 걸을 수 없어 절뚝거리며 나오는데 복잡한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염려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는 하가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때 그날 하가하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하가하던 이사야 54:1 말씀은 무릎 통증이 있는 상황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내 상황과 꼭 연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하가를 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구절을 입술에 올려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부분을 계속 반복하는데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찾아 왔습니다.

‘잠깐만, 출산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잖아. 원하는 결과가 눈에 나타나지 않아도 상황과 상관없이 노래하는 게 중요하겠구나…’

전혀 연관성이 없던 말씀을 하가하다 갑자기 내 무릎이 마치 출산하지 못한 상태와 비슷하단 마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출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과 치유를 얻지 못했던 내 무릎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결과와 상관없이 ‘노래할지어다’라고 얘기한 이사야 서의 말씀이 감동으로 임했습니다. 치유 결과를 얻지 못한 무릎을 대신하여 노래하겠단 마음이 갑자기 들어 왔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무릎아 너는 노래할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주님, 주님은 내 죄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 무릎의 온전함을 위해서도 십자가 지신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 제가 이 무릎을 대신해 전심으로 외쳐 노래합니다…’

말씀에 내 모든 상황을 정렬시키려는 갈망이 있었고, 그런 마음으로 하가를 하던 중에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들어온 믿음을 표현하며 고백하고 선포했을 때 놀랍게도 무릎 통증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이 간증처럼 상황과 전혀 연관이 없는 구절일지라도, 성령님이 그 말씀에 빛을 비춰주시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내 이성적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신뢰하는 자에게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창의적 영감을 주십니다. 말씀에 내 모든 삶을 정렬시키려는 갈망을 가진 자들에게 성령님은 세상이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지혜와 계시를 부어주십니다.

Align & Author 단계의 다양한 사례
다음은 Align & Author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속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기도문으로 작성한 사례입니다.

Align&Author 사례 1주님 오늘의 모든 상황에 주님을 제 앞에 모시고, 제 입에 모시고, 제 마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몸을 유지해주고 자라게 하는 음식을 먹을 때, 말씀도 함께 먹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이 제 안에서 함께 자라게 해주세요. 주님, 제가 목이 마를 때 차나 커피를 마시는데, 이때 육의 목마름만 해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수이신 주님을 마시게 해주세요.. 손을 닦을 때나 세수할 때나 말씀으로 씻겨지게 해주시고.. 삶의 모든 부분에 주님의 말씀을 항상 제 앞에 모시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의 길을 제게 보이시는 주님.. 오늘 어떤 길을 제가 밟고 걸을지라도 그 길이 주의 생명의 길임을 인식하게 해주시고, 말씀을 하가하며 걷게 해주세요. 주님 저의 모든 순간이 당신의 말씀으로 덮이길 원합니다.

다음은 일상의 순간순간을 하가하는 말씀에 정렬(align)시켜보고 살아낸 과정을 글로 표현(Author)한 사례입니다.

1.
월요일 아침, 눈을 뜬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 소리,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새소리. 그리고 연이어 들어오는 해야 할 일들, 미팅, 만나야 할 사람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분주한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기 전에 조그맣게 마음 속으로 읊조린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렇다. 내 생각은 내가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선택한 것으로 순식간에 채워지게 마련이다. 이 아침의 분주한 생각과 하나님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로 채울 수 있을 뿐이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을 생각하는(모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작은 선택이 자칫 우울할 수 있는 월요일의 아침을 바꾼다. 그 결과는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평안이다.
2.
출근길, 좁은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린다. 맞은편 중년의 신사는 쉴 새 없이 신문을 접고 펼치느라 소란스럽다. 뒷사람의 백팩은 쉴 새 없이 등을 찌른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모두 신경이 곤두선 상태의 한 마디가 어떻게 불똥처럼 튈지 모르는 터라 나 자신이 예민해서 그런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눈을 감는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문득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면 뭐라 하실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실 것이다. 피곤하고 힘든 출근길에 선 지하철 안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이다. ‘아버지, 이 안의 모든 지친 이들에게 여유와 기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짜증이 잦아든다. 내가 맨 백팩을 먼저 내려놓고 옆 사람을 위해 공간을 조금 더 내어준다. 그 사람이 고맙다는 듯 무언의 감사 눈빛을 내게 보낸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지만, 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내 앞의 하나님이 웃으신다.
3.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 뭔가를 좀 읽어보려는데 카톡이 울린다. 귀찮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어 열어보니 아들 일로 잔뜩 속이 상한 친구의 카톡이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매번 교무실에 불려 다닌단다. 때린 적이 없는데도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아들 친구와 그 학부모 때문에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저 들어준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지막이 시편의 말씀을 읊조린다. 친구에게 말한다. 아들에게 이렇게 전해달라고. 삼촌은 언제까지나 네 편이라고.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친구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카톡을 보낸다. 카톡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친구의 분노도 잦아들었다.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평안이 인다. 친구도, 그 아들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4.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다. 잠시 모니터에서 손을 떼고 시편 말씀을 다이어리에 적어본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하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셨을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마음에 들어온다. 마음이 편해지니 오히려 자유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일에 더욱 더 몰입되는 나를 본다.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더욱 가깝게 느낀다. 만약 일의 결과가 좋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5.
주말 아침,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의 공부하는 모습을 본다. 괜히 마음에 걸려 물어보니 시험이 다음 주라고 한다.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책을 읽어주며 공부를 시작한다. 축 늘어져 있던 아이의 몸에 생기가 돈다. 전화예절에 관한 글인데 남자애가 나오면 아빠가, 여자애가 나오면 딸이 읽는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시편 16편의 말씀과 지금의 내 모습이 매우 비슷하다는데 생각이 이른다. 딸은 아빠 품에서 자칫 지겨울 뻔했던 공부를 신나게 마쳤다. 아빠는 이 시간이 혼자 책을 읽는 그 시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즐거웠음을 깨닫는다. 아마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6.
작은어머니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와이프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퇴근해서 와이프의 얘기를 들어보니 사촌이 돈 많이 번다는 얘기에 어머니가 발끈하신 듯하다. 와이프는 내게 스트레스를 푼다.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기분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문득 결혼식에 선물 받은 벤츠를 몰고 나타났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세상의 비교로 흔들리지 말라고. 비교의 대상은 연봉도 좋은 차도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의 여부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유쾌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어머니에게는 몸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니냐 말씀드리며 문안 전화를 드린다. 비교로 인한 우울함이 그날 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7.
오래간만에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 편에선 처음 만났던 때의 열정이 사라진 그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어느새 틈틈이 비치는 흰머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누는 이야기도 꿈이나 희망에 관한 이야기보다 그저 현상 유지나 하자는 쪽으로 모아진다. 만약 하나님이 자리에 함께 하셨으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에 여전히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는가의 여부가 아닐까.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밴드를 개설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주고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오른편에 계시는 한 아직 ‘흔들릴’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기 위해서.

다음은 시편 16편 8절 한 절 말씀을 두 주 동안 하가하면서 삶에 적용하고 누린 경험을 저널링 형태로 기록한 사례입니다.

<하가했던 시편 16편 8절 한 절 말씀을 중심으로, 다른 말씀들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고 정렬되는 경험>
하가를 한다는 것. 막상 입술을 열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소리 내어 하가한다는 것은 솔직히 생각보다는 조금 더 귀찮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동안 눈으로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을 머리로,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이해하는 방식이 내겐 가장 익숙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시편 16편 8절의 이 한 절 말씀을 반복하며 틈날 때마다 하가했다. 하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목표는 이 한 절의 말씀을 끊임없이 입술로 중얼거려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암송하는 것이었다. 물론 말씀이 나의 실제 삶 가운데 살아 숨 쉬는 것을 경험하길 기대했지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경험하게 될지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엔 깨닫지 못했다. 반복하여 이 한 절의 말씀을 때론 중얼거리듯, 때론 토해내듯, 때론 들이마시듯, 때론 숨을 멈추듯. 그렇게 내 입술에 포개어 함께 보낸 2주의 시간.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나의 삶의 조각들이 이 말씀 한 구절을 중심으로 조금씩 정렬되는 것 같았다.
2주 동안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루트(화요 예배, 주일 설교, 큐티, 개인 기도 시간, 독서, 만나는 사람들의 입…)를 통해 다양한 말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they may forget, yet will I not forget thee.)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사49:15-16)’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등의 말씀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 각각의 말씀은 개별의 말씀만으로도 내게 충분히 의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각각 서로 다른 말씀들이 시편 16절 8절의 말씀을 매듭(knot) 삼아 서로 엮이고 붙어 하나로 연결되어 단단한 힘을 갖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님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표현(expression)만 달리하셨을 뿐, 결국엔 단 한 가지의 메시지만을 전하고자 하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너를 전심으로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를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주님은 내가 얼마만큼 많은 분량의 말씀을 하가했는지를 보시는 것 같진 않았다. 단 한 절, 단 한 마디만으로도 주님과 내가 서로 통했다는, 서로가 클릭 되어 하나로 연결(connection)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이제까지 내게 익숙했던 묵상의 방식. 눈으로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을 머리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끄덕이며 이해했던 그 방식.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 방식은 혼자만의 공상과 생각의 나락으로 빠질 확률도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은 내 심령에 심어지기도 전에 날려 보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단 하가를 위해 입술을 열고 그 말씀을 입에 머금고 중얼거리다 보니 여타의 잡다한 것이 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2주간 하가로 붙들었던 시편 16편 8절의 한 절의 말씀. 주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하고 큰일을 해내기 위해 그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멀리 있는 것도 피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나의 아주 사소한 작은 습관에서부터 한 걸음씩 실제로, 실체로써 살아내는 것이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한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고칠 수도, 버릴 수도 있듯이. 주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나의 아주 사소한 습관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작지만 큰 결단이었다. 지난 2주의 시간. 시편 16편 8절 그 한 절의 말씀은 내게 더는 활자가 아니었다.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나의 입술을 통해 내뱉기도 들이마시기도 하는 살아 있는 숨이며 호흡이었다.

다음은 말씀에 모든 삶을 적용하기 위한 도구로 하가 트랙커를 사용한 저널링 사례입니다.

하가 트랙커 저널링 사례
Reflect & Respond 단계의 사례
다음은 하가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주님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을 저널링 형태로 기록한 사례입니다.

<시편 16편 8절 말씀을 하가하는 가운데,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됨 - 나의 고백에서 주님의 고백으로>
주로 나의 아침 기도 시간은 밤새 챙겨온 나의 기도 제목을 주님 앞에서 주섬주섬 꺼내어 놓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가를 시작하면서 내 기도 제목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내 입술로 직접 고백하는 것. 즉, 내가 주님께 말하기 전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먼저 듣는 것으로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이날 아침도 나는 시편 16편 8절의 말씀을 나의 고백으로 삼아 하가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이 구절을 몇 번쯤이나 반복했을까?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겨버렸다. 내 마음 어디에선가 매우 자그마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여호와를 정말… 항상… 언제나… 늘… 변함없이… 다른 곳도 아닌 내 앞에… 모시고 있나?… 정말 나는 그러한가?…’ 신경 쓰지 않았다면 절대 들리지 않았을 너무나도 세밀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나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찌르고 있는 준엄한 음성이기도 했다.
‘글쎄… 솔직히 항상은 아니지. 어떻게 사람이 가끔도 아니고 100% 항상… 아니 사실 난… 주님의 존재 자체를 까마득히 잊을 때가 많지. 내 앞에 모시기는커녕… 주님이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주님을 무시할 때가 많지… 어쩜 난. 주님보다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지…’ 나의 입술로 하가했기에 시편 16편 8절의 말씀은 나의 고백이라고 생각했던 나. 하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암송하는 것도, 내 상황을 변화시키는 주문도, 내 마음속 자기 확신도 아니었다. 내게 하가는 실재였으며 빛 그 자체인 말씀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내 마음이며 나의 실체였다.
나는 계속해서 시편 16편 8절의 말씀을 읊조렸다. 연이어 그 음성은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내게 알려 주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주님을 생각하지 않아도… 존중하지 않아도… 배려하지 않아도…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주님을 무시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나보다 앞장서 주시길 원하시는구나… 주님 없이 나 혼자 나서다가 행여라도 내가 잘못될까 봐… 항상… 오매불망 비가오나 눈이오나 나보다 앞서서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나는 항상 주님을 까먹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구나. 늘 기다리시고 계시는구나… 늘 나만 바라보고 계시는구나…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죄송해요 주님 죄송해요…’그리고 이 울림은 점차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며 어느새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로 바뀌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내가 뭐라고…’ 너무나 죄송한 마음에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흐느끼고 있는 나를 조용히 토닥이고 계셨다. ‘사랑하는 내 딸아 괜찮아… 괜찮아 난 괜찮아. 너만 괜찮으면 난 아무래도 괜찮다… 그저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된다.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이다 사랑한다 내 딸아…’ 주님의 순전한 고백에 나의 눈물은 더 뜨거워졌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어서, 어떠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그 사랑을 깨닫게 되니 죄송함의 눈물은 어느새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바뀌었다. 주님의 사랑 고백에 나도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이제 저는 제가 누군지를 알아요. 제가 어디에,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를 이제는 알아요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사랑해요 주님… 감사해요 주님…’ 내 입술을 열었기에 나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하가. 그러나 그 조차도 주님은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사로잡아 결국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사랑 고백으로 바꾸신 것이다. 주님의 고백으로 비로소 나는 내가 바라보는 ‘참 별로인’ 내가 아닌, 주님이 바라보시는 ‘사랑받고 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주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를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젠 날 향한 주님의 고백이 나의 주님을 향한 고백으로 드려지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실전] 7일 동안 ‘하가’ 함께 해보기 – 사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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