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알려면… 묵상이 아니라 하가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묵상이 아니라 ‘하가’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시리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것인가, 나의 인생을 살 것인가?본격적으로 하가(HAGAH)를 공부하고 싶다면...
하가(HAGAH) 기초 –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1)하가(HAGAH) 실전 –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2)
1.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통찰과 깨우침이 클 수록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과 생명의 교감이 없는 ‘앎’은 ‘~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아는 것’만큼 변화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 변화란 내 자신은 줄어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만큼 나타나는 가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 아무리 탁월하게, 깊이,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 인해 세상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크리스천만 많아서일 것이다.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친밀해질 수록 서로 영향을 미친다. 가까워질 수록 서로 닮아 간다. 그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의 사랑은 교과서로 배우는 지식이 아닌 실제다. 거듭난 자 안에 하나님의 ‘진짜 생명’이 내주하신다. 이 생명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 만큼 실제다. 만일 내게 변화가 없다면 생명과 생명의 접촉이 없다는 방증이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고 있다… (호세아 4:6 上)
My people are being destroyed because they don’t know me… (NLT)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로 번역했다. 이때 ‘지식’의 히브리어 원어는 ‘다아트’다. 이 단어는 ‘알다’를 뜻하는 어근 ‘야다’에서 온 명사형이다. ‘야다’는 단순히 ‘아는 것(to know)’만이 아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포함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세기 18:19)
For I know him… (KJV)
개역개정은 ‘택하였나니’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알다’를 뜻하는 ‘야다’다. 그래서 KJV 버전은 ‘I know him’으로 번역했다. 특급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맡길 때 몇 번 봐서 아는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겪고 경험하여 ‘아는(야다)’ 사람을 ‘택할 것’이다. 창세기 18:19 KJV 버전은 내가 아브라함을 ‘안다(야다)’로(I know him) 시작한다.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만큼 ‘알기(야다)’때문에 ‘택하였다(야다)’고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아브라함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닌 직접 사귀고 교제하고 경험하고 겪어서 ‘아브라함을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창세기 18:19 앞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야다(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처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야다’의 관계다. 하나님이 말씀에서 ‘나를 알라’고 말씀하실 때는 이 정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야다’는 부부간의 단어이기도 하다
결혼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통해 ‘아는 것’이 ‘야다’다. 하나님이 ‘나를 알라’고 하실 때 ‘야다’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세기 4:1)
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KJV)
개역개정은 ‘동침하매’로 번역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다. KJV 버전은 이 부분을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Adam knew Eve)’로 번역했다. ‘야다’는 단순히 ‘~에 관해서 아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야다’는 부부만이 알 수 있는 이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포함한다. 이런 근원적 의미를 알 때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내 백성이 지식(야다)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4. ‘손’과 ‘아는 것’은 깊은 관련이 있다
히브리어로 손을 뜻하는 ‘야드’는 ‘야다’와 어원이 같다. ‘손(야드)’으로 어떤 물건을 자주 만지고, 잘 다루면 그 물건과 친밀하여 잘 ‘안다(야다)’는 의미다. 그래서 ‘야다’에는 ‘잘 알아 ~을 잘 다루는(be skillful in)’이란 뜻도 들어 있다. ‘야드’는 기념물로도 번역을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손(야드)’ 때 묻은 물건은 남은 자에게 귀중한 기념물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야드)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사 56:5)
하나님은 ‘손(야드)’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에베소서의 이 부분을 NLT 버전은 ‘우리는 하나님의 명작이다(we are God’s masterpiece)’로 번역했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손’ 때 묻은 ‘명작(masterpiece)’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For we are God’s masterpiece… (NLT)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야다’로 아신다. 우리는 주의 손바닥에 새길 만한 ‘기념물(야드)’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야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야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야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야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1~4)
5. 예수님도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7장 23절의 ‘알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다.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에게 도무지 알지(기노스코, 야다)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수많은 예배, 기도, 찬양, 성경공부, 제자훈련, 헌신, 순종, 충성, 전도, 선교, 귀신 쫓음, 방언, 예언, 각종 은사 행함, 심지어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야다) 없이 종교적으로 행해질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초대 교회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의 형태를 띠고 벌어지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야다)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I want you to show love, not offer sacrifices. I want you to know me more than I want burnt offerings. (NLT)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부부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기노스코)’,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이라고 단언한다. 영생은 죽음 이후 누리는 삶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영원한 생명과 관계를 맺는 것(야다)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And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ESV)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야다(또는 기노스코)’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에 ‘야다’로 연결된 자가 영생한다. 현재 영생하는 자가 죽어서도 영생한다. 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될 때 그 생명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이 변화가 바로 ‘성화(聖化)’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을 안다. 바울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본다고 했다. 주의 영광을 보려면 수건이 벗겨져야 한다.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는 것. 그것이 곧 계시다. 계시를 통해 주의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아 가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 모든 신앙 여정의 핵심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도 없다.
True wisdom consists in two things:
Knowledge of God and Knowledge of Self.
Without knowledge of self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 존 칼빈 –
하나님 아버지,
저를 먼저 아시고 지으신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저를 통하여 세상가운데 나타내어 지고 영광 받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